2004-2. 축복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민6:22-27
설교일시 200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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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민6:22-27
(2004/1/11)

● 소용돌이치는 버릇을 고치려면

어떤 여성이 명품을 갖고 싶은 열망 때문에 친구의 오피스텔에 들어가 옷을 훔쳤다가 구속되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 여성은 부끄러움도 없이 '명품'이 너무나 갖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하더군요. 소비사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따라 가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소비사회가 제시한 행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표류하는 난파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줄어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함은 사라집니다. 행복! 우리는 광적으로 행복에 집착합니다. 집착이 클수록 마음의 허전함도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지주를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시편 4편 기자를 통해 들려오는 말씀은 준엄하게 우리를 꾸짖습니다.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을 찾아 헤매려는가?… 무서워하여라,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말아라"(시4:2, 4)

헛일을 좇고 거짓을 찾아 헤매는 삶, 부정하고 싶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집니다. 욕망의 잔을 채우려고 허둥대다보면 마음의 평정을 잃고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화를 냅니다. 마음의 여백이 사라지면 우리는 일상을 지옥으로 경험합니다.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아버지의 집입니다.

나쁜 물을 고치려면 그 물을 강으로 돌려보내야 합답니다. 소용돌이치는 버릇이 물에 들었으면 바닥을 파서 물을 바다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처럼 나쁜 버릇을 고치려면 우리 생명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안에 평강이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기까지는 우리 마음에 안식이 없습니다.

● 축복을 위해 부르심 받은 사람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냥 돌아가면 됩니다. 그래도 너무 막연하다구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자기 행복을 우선적으로 구하지 말고 남을 복되게 하려고 살아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아버지께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는 것'이 아론과 그의 가족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마음에 드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눅6:28)

바울 사도는 축복하며 살아야 하는 기독교인의 소명을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고전4:12b-13a)

그러면 누가 남을 축복하며 살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지켜야 할 자기가 없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남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할 때마다 13세기의 성자 프란시스의 일화를 떠올리곤 합니다.

프란시스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확고한 신앙으로 무장하기를 원하여서 아씨시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산의 동굴에 엎드린 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그에게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프란시스야!"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분부하소서."
"프란시스야, 네가 아씨시로 갈 수 있느냐? 네가 태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너를 아는 그곳으로 가서 네 아버지 집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손뼉을 치면서 내 이름을 부를 수 있겠느냐?"
프란시스는 떨면서 듣고 있었지만 대답은 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훨씬 더 그의 귀 가까이에서 들렸다. "너는 이 프란시스를 네 발밑에 짓밟을 수 있느냐? 넌 그에게 굴욕을 줄 수 있겠느냐? 이 프란시스가 우리의 결합에 방해가 되고 있다. 그를 죽여라! 아이들이 네 뒤를 쫓아가면서 돌을 던질 것이고, 젊은 숙녀들은 창문을 열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돌에 맞아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의기 양양하게 외쳐야 한다. '누구든지 내게 돌 하나를 던지면 하나님께 한 번 축복을 받을 것이고, 돌 두 개를 던지면 하나님께 두 번 축복을 받을 것이고, 돌 세 개를 던지면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축복을 받을 것이오.' 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겠느냐고? 왜 말이 없느냐?"
프란시스는 떨면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자신에게 뇌까리고 있었지마는 그 생각을 나타내기에는 부끄러웠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주님, 광장 한복판에서 춤을 추며 당신의 이름을 외쳐야 한다면 저를 다른 도시로 보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단호하고 경멸적으로 대답했다.
"안 돼! 아씨시라니까!"
프란시스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입술을 대고 있던 땅을 쳤다. "주님, 자비를 주소서." 하고 외쳤다. "제 영혼과 몸이 그 일을 준비할 시간을 좀 허락해 주시옵소서. 사흘만 부탁합니다. 사흘 낮과 사흘 밤, 그 이상은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다시 천둥처럼 울렸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귀가 아니고 그의 창자 속에서 들려왔다.
"안 돼, 바로 지금이다!"
"왜 이다지도 서두르십니까, 주님! 왜 제게 이다지도 심한 벌을 내리시려고 하십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 목소리는 지극히 부드럽고 온화하게 프란시스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모든 아픔이 가슴에서 떠나고 어떤 힘이 그에게로 들어왔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닌 전능의 힘이었다. 그는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빛나기 시작했고, 그의 무릎은 견고했다. 그는 잠시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해는 이제 막 지려 하고 있었다.
"제가 갑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聖 프란시스』89-90쪽)

자아는 하나님과 우리의 깊은 사귐을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프란시스'에게 그 거짓 이미지를 짓밟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스승인 비노바 바베는 사람들이 길 바닥에 배설한 분뇨를 치우는 일을 자신의 예배로 삼았습니다. 그는 "천한 일이 일종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어서 단 하루도 그 일을 거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싫어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 어떤 축복을?

그러면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빌어야 할 복은 어떤 것입니까? 돈 많이 벌게 해달라구요? 출세하게 해달라구요? 그것도 나쁠 것은 없지만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을 빌어야 합니다. 포로기 이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아론의 축복문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돈이나 연줄이 혹은 나의 힘과 경험이 나를 지켜주리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우리 곁을 떠나가게 마련입니다. 우리를 굳게 지켜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걱정많은 세상에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는 방법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문제보다 큼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빛나는 얼굴을 비춰주신다 함은 호의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밝은 빛을 보며 살게 됩니다. 이보다 확실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이웃들이 다 주의 빛나는 얼굴빛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신다 함은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히브리의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노여움을 푸시고 그 얼굴을 자신들을 향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면 우리의 기도는 헛것이 되고, 우리의 앞길은 막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외면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지속적으로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진심으로 고개를 들 때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십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모두가 얼굴을 찡그리고 사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축복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약속이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자아를 극복하고 날마다 이웃을 축복하는 것으로 우리 삶의 보람을 삼을 때 우리 삶은 넉넉해지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디 축복의 말을 우리 입에 담아주시기를 소원하십시오.
날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위해 축복하십시오.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식구요, 지체로서 축복을 위하여 부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멋진 소명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 날마다 하늘의 복을 나르는 수레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1월 11일 13시 45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