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 사랑의 레가토
설교자 김기석
본문 엡4:11-16
설교일시 200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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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레가토
엡4:11-16
(2004/1/18)

● 레가토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인 인간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이는 가위나 칼을 가지고 삽니다. 갈라내고 자르는 것이 그의 특기입니다. 어린 시절 여자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할 때 그것을 자르고 도망가는 악동들이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의 분노 섞인 원망을 자초하는 일이지만 그건 사실은 소통과 만남에 대한 역설적인 요구일 것입니다. 이것은 애교로 볼 수 있겠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자르는 일을 소명인양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불화가 있고, 상처 입은 이들의 신음소리가 있습니다. 소위 trouble-maker입니다. 하지만 가슴에 간직한 도구가 실과 바늘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뉜 것을 하나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하나여야 할 것이 나뉜 경우에 해당합니다. 본래 나뉘어 있어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을 무리하게 합쳐놓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peace-maker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 들어있는 레가토(legato)라는 단어는 매력적인 음악용어입니다. 끊지 않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연주하라는 뜻이라 합니다. 악보를 읽다보면 음표 위나 밑에 초승달 모양의 표가 높이가 다른 두 음표를 서로 이어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전을 보니까 이 기호를 슬러slur라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 개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이 용어를 보면서 저는 세상에 있는 많은 나뉘어 있는 것 위에 레가토 기호를 그리는 제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연결입니다. 어느 누구도 홀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느 분은 '탯줄'을 가리켜 생명의 레가토라고 말하더군요. 어머니와 아이가 한 생명에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지요. 이러한 육체적 탯줄을 있게 한 정신도 사랑도 역시 레가토입니다.


● 십자가, 하늘과 땅의 이음줄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것은 어쩌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인 그리움과 기다림을 이야기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정작 아름다운 것은 까막까치가 놓아주는 오작교(烏鵲橋)가 아닌가 싶습니다. 둘의 공간적 격절을 이어주는 사랑의 다리, 이것은 만남에 대한 갈구가 낳은 하늘의 레가토가 아닐까요? 이제 며칠 후면 설날이 됩니다. 설날이면 오랫동안 헤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기들의 뿌리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차례상은 어쩌면 저 세상과 이 세상으로 갈린 조상들과 우리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기억의 레가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이음줄(slur)이십니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나뉘었던 하늘과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이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서 죄인도 원수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며 삶을 경축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단을 보십시오. 독립운동가인 시몬과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품은 용광로입니다. 그 품 안에서 '작은 차이'(小異)는 녹아내리고 '큰 같음'(大同)으로 거듭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동안 수없이 읽었겠지만 유독 이번에는 16절에 나오는 '연락'(聯絡, fitted)과 '상합'(相合, joined together)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지게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청파신앙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도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미들의 사회를 생각해봅니다. 개미는 작은 것이지만 개미가 이룬 한 몸 공동체는 작지 않습니다. 그 개미들의 사회야말로 어떻게 보면 공동체의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개미들은 그냥 두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한 몸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본문에 의지해 살펴보겠습니다.


● 우리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

첫째, 우리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돈 벌고 아파트 평수 늘리는 것, 자식 교육 잘시키는 것도 중요한 목표일 수 있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수십 억년이나 되는 우주의 역사가 낳은 '나'라는 존재가 이루어야 할 존재로서의 목표입니다. 13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 이 말씀이 참 부담스럽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흠이 많고 어설픈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어느 곳에 있든 하늘과 땅 사이에 레가토 기호를 그리는 사람, 냉랭하게 갈라진 마음들을 사랑으로 녹여 대동의 세상을 열어가는 사람,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섬기는 자의 자리에 서는 사람, 우리는 그런 존재로 거듭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둘째, 자기에서 주어진 역할을 옹골차게 감당해야 합니다. 十人十色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저마다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이 어쩌면 복인지도 모릅니다. 잘 생긴 사람/못 생긴 사람, 성격이 급한 사람/느긋한 사람, 머리 좋은 사람/둔한 사람, 감성적인 사람/무딘 사람…물론 우리는 사회가 매긴 가치의 순위에 따라 선호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가 다 소중한 역할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며 살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어깨를 곁고 앞으로 나아가는 청년들을 보십시오. 그들 각자의 힘은 약할지 모르지만 함께 한 그들의 의지는 강합니다. 혼자는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도 없고, 간교한 이설과 유혹의 풍랑에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믿음 가운데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벽돌이 아닌 돌로 쌓은 축대를 보십시오. 다양한 모양의 돌들이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음으로 서로 연락되고 상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해서 침을 흘리며 그것만 바라보다가는 어느새 인생의 겨울이 다가왔음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맡겨진 역할이 무엇이든 감사함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우리 영혼이 커지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남의 일은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연주회에 처음 갔던 소년이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연주회가 끝난 후에 무대 뒤로 달려가 지휘자에게 부탁했습니다. 나도 단원으로 받아주십시오. 지휘자는 너는 무슨 악기를 연주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했더니, 아이가 지휘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나도 막대기를 들고 앞에서 휘젓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소년과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도 철이 들지 않았다는 차이점만 뺀다면요.


●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사람들

셋째, 할 수 있는 한 봉사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준비시켜 봉사활동을 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시간을 내고, 돈도 아끼지 않고, 땀을 흘리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랍니다. 봉사란 무엇입니까? 소외된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의 끈으로 이어주는 행위입니다. 봉사는 결국 사랑의 레가토란 말입니다. 봉사는 형편이 좋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열릴 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열심히 봉사활동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봉사는 남을 돕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봉사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판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편하고 싶은 자아의 욕구에 굴복하는 한 우리는 봉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싶은 욕구를 단칼에 베어내고 궂은 일에 몸을 맡기는 순간 우리 영혼의 키는 조금씩 자라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도 자라납니다.


● 중심이신 그리스도

넷째, 언제나 우리 삶의 영원한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관계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설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라 해도 그리스도를 통해 그와 만나면 우리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견우와 직녀의 아픔과 그리움을 깊이 이해하면서 스스로 다리가 되어주었던 까막까치처럼 지금 세상은 '까막까치'가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성도의 가슴에는 사랑의 레가토가 가득해야 합니다. 삶의 높낮이가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미움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강파라진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드는 사랑의 일꾼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에로스는 사랑의 화살을 쏘아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이보다 잘 사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의 삶이 나뉘어진 세상을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의 레가토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1월 18일 17시 05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