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참 멋진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9:19-23
설교일시 200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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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멋진 사람
고전9:19-23
(2004/1/25)


● 자유인의 초상

예수님을 믿는 보람이 무엇인가요?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다고요? 좋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으니 행복하시던가요? 조금은…. 그래요, 세상에 완전히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어디에도 매인 데 없이 활달하게 살고 계십니까? 그렇지는 못하시다고요? 어쩌면 그게 정직한 대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몸을 움직일수록 더욱 더 뭔가에 얽혀 들어갑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의 말은 불가사의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9:19)

물론 여기서 '∼에게'라는 부사격 조사는 탈격(奪格)을 나타내는 '∼에게서'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쨌든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자신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확신이 정말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저런 인연에 얽혀 포박당한 것처럼 살고 있는 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홀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철학자인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을 가리켜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라고 했는데, 이 말은 인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는 또 인간을 '서로 함께의 존재'(Mit-einander-Sein)라고도 했는데, 말은 복잡한 듯 하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잘 산다는 것은 함께 살아야 할 이들과의 관계 하나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그런 관계들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야, 나 힘들어서 아빠 노릇 그만두겠다." "저 이제 자식 노릇 그만 할래요."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게 뭐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인가요?


● 하나님에게 매인 해방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모든 관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관계 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 아니 집착하기에 오히려 자기를 확고히 사로잡았던 것들로부터도 해방된 것입니다. 부럽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냥 탁 놓아버리면 된다구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엊그제 김훈동 집사님 식구들과 북한산에 다녀왔는데, 산에서 내려와 함께 갔던 서현이에게 오렌지를 권했더니 배불러서 안 먹겠다고 해요.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까 오렌지를 먹고 있는 거예요. "너 안 먹겠다고 하지 않았니?" 하고 물으니까, 서현이 대답이 이래요. "글쎄요, 얘가 어느새 제 손가락에 잡혀 있더라고요." 꼭 이런 거지요. 놓아도 돌아오는 게 인연인가 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말 모든 관계를 소중히 보듬으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시면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 후에는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맡기면 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할 일입니다. 내가 뭔가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자유가 옵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집착하는 것도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 아이들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盡人事待天命이라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다 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지요. 맡김에서 오는 편안함, 홀가분함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벗어 던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순리대로 살아갈 때 찾아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자인 장자는 이것을 "하나님에게 매인 해방"(帝之縣解)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세상의 번거로운 일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 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매인 해방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난도 고통도 동족들에게 받는 모욕도 그의 자유를 뒤흔들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 모든 사람의 종이 됨

그런데 그런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자기가 경험한 자유가 너무도 크기에,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맛보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좋은 세상이 있는데, 궁상을 떨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광활한 자유의 새 땅을 본 사람이 보기에 일상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안쓰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몸을 입고 땅에 내려오심과 같이,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기를 택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더 많은 사람을 얻는다'는 말은 많은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 그 이상의 의도가 없습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강요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유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이 말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철저한 자유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면서도 결코 더럽혀질 수 없는 정신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않고, 용서하고, 신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녕 하나님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말은 그럴싸한 은유적 개념이 아닙니다. 관념적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워진 발을 친히 닦아주신 것처럼 바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비굴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그의 구원을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자유자재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살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이들에게는 율법 없는 것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유자재의 변신은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을 주체성 없는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물은 담기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형태를 바꾸지만, 물의 본성 자체가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바울은 오랜 삶의 습성을 통해 만들어진 '자아'(ego)는 버렸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고 담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본래의 '자기'(self)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대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는 결코 본질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과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자연히 발걸음을 늦추게 됩니다. 아기들을 어르는 어른들의 말과 표정은 아이들과 비슷합니다. 아기가 앞에 없는 데도 그런 말투를 쓰고, 그런 표정을 짓는다면 실성한 사람 소리를 듣기 딱 좋을 겁니다. 바울은 높은 곳에 서서 여기까지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 그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이 마음이야말로 구원받은 이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 참 멋진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바울 사도가 맛본 자유는 우리도 이미 맛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산다면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은 멋진 사람입니다. 잘 생기고, 멋진 장식물을 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그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4:8) 했습니다.

제일 좋은 경건의 연습은 '집착을 버리는 연습'일 겁니다. 식욕, 물욕, 색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욕구가 강하게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거절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영혼의 근육이 자라납니다. 요즘 들어 얼짱이니 몸짱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입니다. 몸 좋은 사람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별로 부럽지는 않습니다. 저는 영혼의 근육이 잘 발달되어 한없이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몸짱 말고 '얼'(靈)이 멋있는 '얼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착을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참 자유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먼저 취하려는 삶의 습성을 버리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남의 몫으로 남겨두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실패할 때가 많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기를 부단히 연습하다 보면 우리 속에 가득 찬 하늘의 기쁨을 맛볼 날이 있을 겁니다. 교우들 모두의 삶이 복음이 주는 참 자유 속에서, 섬김으로 빛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4년 01월 25일 15시 07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