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 경계 가로지르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가 7:24-30
설교일시 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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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가로지르기
마가 7:24-30

● 우리 사회의 경계선들

얼마 전 서울대학교 입학생에 대한 분석 자료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8학군 지역을 한 묶음으로 묶고 다른 지역을 기타 지역으로 묶어서 학생 수에 따라 비교해 보니까 8학군 지역 학생들의 서울대학교 합격률이 기타 지역에 비해 무려 16배가 높았답니다. 사람들이 8학군, 8학군 노래 할만도 합니다. 어머니가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에 비해서 전업주부 어머니를 둔 아이들의 합격률이 3배 가량 높았다고 합니다. 이건 뭔가 심각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양반/상놈의 구별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층에 의해 분화되고 또 그것이 고착화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경계선은 참 다양합니다. 경제력, 학벌, 지역, 진보와 보수…이런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서로를 낯선 사람인 양 바라봅니다. 경계선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경계선들은 불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텅 빈 것(空)이고, 허깨비(幻, illusion)일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실체로 알고 살아갑니다. 사람됨이야 어쨌든 그 사람이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와' 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얼짱이나 몸짱보다 더 인기있는 게 돈짱이라지요? 돈만 많으면 다른 것은 다 용서가 된다는 것인가요?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보수진영에 속한 사람들을 수구·꼴통이라고 하고, 보수진영에 속한 이들은 진보진영 사람들을 반미·친북 세력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런 외적인 간판, 혹은 사람들이 부여한 찌지에 가려 잘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卽物主義의 시대는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유인, 정신적 유목민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분열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의 사도들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도 인간이다

예수님은 정말로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여러 가지 경계선들로 찢기워 있었습니다. 여자/남자, 의인/죄인, 유대인/이방인, 정결/부정…. 이런 가름의 기준이 되는 것은 '거룩'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말이 당시에는 사람들을 가르는 비정한 칼날이었습니다. '거룩'은 바리새파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 외에는 다 속된 사람들로 규정되었습니다. 훈련소 시절 내무검열을 받으면, 우리는 한다고 하는 데도 교관들은 귀신처럼 허점을 찾아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굳이 찾자고 하면 허물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룩'이라는 거울을 통해 사람들을 보니까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회의 특권층에 의해 독점된 '거룩'은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하지만 '자비'는 누구라도 품어줍니다. 예수님이 여인들과 만나고, 죄인들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병든 이들의 몸에 손을 대 고쳐주신 것은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북부에 있는 두로 지역에 들어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까닭은 자세히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여행삼아 그곳에 가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기도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다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비장한 느낌을 줍니다. 저는 예수님의 고민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너무 이상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처럼 뜨거운 살과 피를 가진 분을 우리가 만든 관념으로 포박해서 박제화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예수님도 배고픔의 고통을 아셨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번민하셨고, 죽음에 직면해 두려워하셨습니다.


● 예수님의 낯선 모습

예수님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두로에 가서 은밀히 지내시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함께 성전 체제를 대표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두개인,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협을 실감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참다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은 급합니다. 예수님은 잠시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당신의 선교 사역의 범위와 과정을 돌아보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그런데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은 숨길 수 없고(囊中之錐), 난초의 향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을 숨기실 수가 없었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지금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이 여인의 느닷없는 출현은 분명 귀찮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목소리는 퉁명스럽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경계선을 넘나들며 사람들을 자비로 대했던 예수님이 과연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나, 우리는 의아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해석합니다. 그럴싸하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구절은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레바논의 해변 지역인 두로 는 매우 부요한 도시였는데, 그들은 갈릴리 북쪽 산지의 농부들로부터 농작물을 사다가 먹었습니다. 그런데 농작물이 귀한 겨울이 되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갈릴리의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자조적으로 떠돌던 이야기가 바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더라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개들'이라는 말은 충격적입니다.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는 유대적인 편견을 예수님도 갖고 계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개라는 말이 흔히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지칭할 때 쓰는 '거리를 헤매면서 썩은 음식찌꺼기를 주워먹는 개'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애완견을 지칭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이 '용어'에서 희망의 단초를 봅니다. 예수님의 말이 비록 모멸적이라고 해도, 여느 유대 남자와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여인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꼭 붙잡습니다.


● 기꺼이 개가 되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모멸적인 언어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귀신들린 딸의 치유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기꺼이 개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개라면 어떻습니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모성을 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작은 상처'에 걸려 넘어져서 '큰 것'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못 말리는 모정이 일으킨 변화입니까? 그것도 예수님의 변화 말입니다. 여인의 이런 절대적인 사랑은 유대인들에 대한 사역 때문에 번민하고, 그들의 냉대에 상심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새로운 지평으로 끌어내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래 마음으로 돌려놓았다는 말이 합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깨우침이기도 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큰 문제, 즉 유대인 전체의 구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당장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큰 문제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립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정치 이야기, 통일, 세계 평화….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집안 식구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는 무관심합니다. 『미성년』이라는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을 사랑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그것이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땀을 흘리고, 물질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건 쉽지 않습니다. 슬픔에 잠긴 여인의 애절한 소망은 예수님을 관념의 공간에서 구체적인 현실의 공간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성령은 그 여인을 통해 문화적 인종적 지리적 경계선을 가로질러 진리를 향하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확장하라고 예수를 이끌고 있습니다. 여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메신저 노릇을 감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비로소 자기 앞에 있는 그 여인이 이방인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이야기의 종결 부분에 예수의 찬탄이 나옵니다.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15:28)

모든 상황이 여인에게 불리하고, 희망의 단초조차 잘 보이지 않는 때에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새 삶을 얻을 수 있다면 체면 따위는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절대적인 사랑이야말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드리워졌던 그늘은 여인을 통해 말끔히 걷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커다란 결실이 보이지 않아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세상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다 도울 수 있냐고 지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다 도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손이 미치는 곳에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The kingdom of God is at hand!)는 말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록처럼 덧붙여진 이야기는 여인의 귀신들린 딸이 고침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

저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만남이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사람들 사이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사셨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여인처럼 큰 믿음과 큰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4년 02월 01일 13시 51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