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 이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에스겔 47:6-12
설교일시 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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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에스겔 47:6-12
(2004/2/8)

단테가 쓴『신곡』의 <지옥> 편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답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 여러분은 그런 글귀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지옥이란 희망이 없는 곳을 일컫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사람이 저지르는 죄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누군가로부터 희망을 빼앗는 것이라지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겪는 멸시와 천대도 아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삶을 지탱해 줄 희망을 빛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온 것은 하나님이 무기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임을 이제는 압니다.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열을 올렸고, 예언자들은 흰소리나 해댔고, 힘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의 껍질까지 벗겨먹으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어도 길이 보이질 않습니다.


● 보좌에서 발원한 물

하지만 에스겔은 마른 뼈처럼 서걱대는 백성들이 어떻게 희망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정작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주권도, 영토도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은총의 샘물이 넘치는 곳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시84:6), 저녁에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시30:5),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을 싸매주시는 하나님(시147:3)을 잊었기에 그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이 땅을 짚고 일어서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에 겪는 고통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얼이 빠진 사람이 고생을 하면 불평만 쌓이지만, 얼이 든 사람이 고생을 하면 얼어 영글게 마련입니다. 에스겔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봅니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보려 하지 않을 때에도 영의 눈을 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은 상처 입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희망을 봅니다. 고단한 인생살이에 지쳐 아무 것에도 반응할 줄 모르는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그들 속에 새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심어주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마른 뼈처럼 서걱대는 사람들 속에 생명의 영으로 임하셔서 그들을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는 새 사람으로 바꾸어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가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47장에 나오는 비전입니다. 에스겔은 성전의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 나와 구비구비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발목에 닿던 물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깊어져서 무릎에 닿고, 허리에 닿더니, 마침내 걸어서 건널 수 없는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 생명을 살리는 물

에스겔은 천사의 안내로 성전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 강가로 나갔습니다. 강 좌우편에는 잎이 청청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습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긴 에스겔에게 천사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강물은 동방으로 향하여 흐르다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천사의 다음 말입니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다는 '사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요단강이 흘러 사해에 이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해에 이른 물은 더 이상 흐르지 못합니다. 해수면보다 더 낮은 곳에 있기에 사해는 출구 없는 바다가 되었던 것입니다. 흐르지 못하고 막혀 있기에 사해는 염분이 많아져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가 사해마저 생명의 바다로 바뀔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참 장대한 꿈입니다. 그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명들이 깨어나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강 좌우편에서는 어부들이 그물을 던집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비전이지 물리적인 현실은 아닙니다. 실제로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지하에서 나오는 물도 생명을 살리는 물이 되어야 하게요. 이 비전은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총임을 선언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이 강물'이 흘러들어야 하는 곳은 세상살이에 지쳐 사해처럼 변해버린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강물이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우리 영혼에 흘러들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깨어나게 됩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자기 죄를 씻기 위해 에우리스테우스 왕의 종이 되었는데, 심술스러운 왕은 그에게 열 두 가지 과업을 해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하루동안에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외양간에는 소가 수천 마리 살고 있었고, 여러 해 동안 한반도 청소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이지만 헤라클레스는 알페이오스 강과 페네우스의 강물 줄기를 외양간으로 끌어들여 단번에 외양간 청소를 끝냈습니다. 물론 여기서 외양간에 쌓인 온갖 오물은 헤라클레스의 마음에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로 미움, 시기, 질투, 원망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찌꺼기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우리 영혼을 통해 흘러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씻음 받은 새 사람이 되면,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보아도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된 우리는 비로소 또 하나의 강물이 되어 누군가의 삶 속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 흘러가고, 인정이 메마른 불모의 땅에 흘러가 생명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절망의 쓴 물이 희망의 단 물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흘러가는 곳에서는 불의가 사라지고 의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늘이 물러가고 부드럽고 따뜻한 광채가 솟아나야 합니다. 불화와 다툼이 물러가고 평화가 깃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생명의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 흐르지 않는 물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천사는 에스겔에게 은혜의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일어나는 생명의 기적을 말해주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펄'과 '개펄'은 수렁이나 웅덩이에 고여있는 물을 뜻합니다. 그런 물은 단물이 되지 못하고 짠물로 남아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물은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흘러갑니다. 흘러가면서 뭇 생명들을 살려내고 마침내 자신도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여 있는 신앙, 다시 말해 우리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자전거가 구르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처럼, 신앙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와 남에게 해가 됩니다. 우리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함께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태양을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해는 우리에게 '햇빛'과 '햇볕'으로 다가옵니다. 햇빛은 밝음입니다. 밝다는 것은 본다는 뜻이고 본다는 것은 안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햇볕은 따뜻함입니다. 따뜻함은 생명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햇볕은 온갖 얼어붙은 것들을 녹여 흐르게 만듭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스스로 밝은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에 작용하여 생명의 싹을 틔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행함의 통일입니다.

오늘 각급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임명받은 교사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 조금씩이나마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늘 깨어있기를 바랍니다.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뭇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우리들이 강물이 되어 흐르는 곳마다 사랑과 생명과 평화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4년 02월 08일 17시 02분 1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