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높이 그리고 함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이사야 57:14-21
설교일시 2004/2/15
오디오파일 s040215.mp3 [564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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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그리고 함께
이사야 57:14-21


●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정작 이런 질문 앞에서는 입을 다물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말과 척도도 하나님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크다'는 말은 그보다 작은 어떤 비교의 대상이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높다', '넓다', '위대하다' 등등의 형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마주 세워놓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은 치유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경험될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이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려는 도둑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인 코헬렛은 이런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 높이, 그리고 함께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일까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첫머리가 그 대답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heaven)에 계십니다. 물론 이 때의 하늘은 새들이 자유롭게 나는 창공(sky)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공중의 새들이 우리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하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하늘은 텅 빈 듯 보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도, 또 우리가 어디에 가더라도 하늘은 늘 그곳에서 여여(如如)한 얼굴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때로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하늘은 그곳에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변함없이 있다는 것을 유식하게 말하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이중적으로 경험합니다. 하나는 '높이 계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장엄한 표현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계시기에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귀추를 다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감히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 곁에 늘 함께 계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잘 달리는 차를 타고 달려가도 하늘은 늘 그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여 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마음이 겸손한 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회개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고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때때로 절망에 빠질 때도 있지만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려 일어서게 하는 힘은 바로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때때로 생의 용기를 잃어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엎드릴 때 우리 속에 찾아왔던 위로는 바로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자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갑니까? 우리 영혼의 하늘에 구름이 드리웠기 때문입니다.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쳐 하늘을 우러르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교만한 마음이, 지나친 욕심이 은총의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늘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서 세상을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1969년에 작고한 시인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마음 속 구름을 닦고, 머리 덮은 쇠 항아리를 찢은 사람들이 곧 겸손한 사람이요,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삶은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외경畏敬'이고, 다른 하나는 '연민憐憫'입니다. 외경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경탄이고, 연민은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외경하는 사람은 겨울 냇가를 건너는 사람처럼(豫兮若冬涉川 ― 노자, 도덕경 15장) 발걸음도 조심스럽게 마음을 모으며 살아갑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 맺힌 것을 푸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도 때로는 화를 내시기도 하고,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일까요? 우리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릴 때입니다. '탐심의 죄악'이 문제입니다. 공동번역을 이 대목을 "그들이 너무 못되게 욕심을 부리므로 나는 성이 났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할 때입니다. 달리 말해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갈 때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은 믿을 만한 게 못됩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17:9)이라고 했겠어요. 욕망에 달아오른 마음은 우리 영혼을 속이거나 결박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일 생각도, 그 뜻대로 살 생각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 삶의 결과는 '패역悖逆'(도리에 어긋나고 불순함)입니다. 이럴 때 우리 영혼에는 먹장구름이 끼고, 쇠 항아리가 의식을 덮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곧 우리 삶에 대한 심판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노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히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은 마음을 푸시고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보다 큼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57:16)

하나님은 사람의 소행을 다 아십니다. 몸을 가진 인간이 얼마나 죄의 유혹에 약한가를 아시기에,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우리 영혼을 고쳐주고, 인도하고, 도와주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평화를 맛봅니다. 참된 평화, 그것은 우리 욕망이 다 이루어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주님이 선물로 주신 평화를 맛본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을 저는 한 마디로 '길 만드는 자의 삶'이라 하고 싶습니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57:14)

이 명령이 누구를 향한 것이든 우리도 역시 그 명령의 수령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차갑고 거친 물살에 떠밀리면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 징검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앞을 보지 못하는 최민석이라는 학생이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가 명문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많은 장애우들에게 희망의 징조가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내 시선은 그 학생을 넘어 그의 입학을 결정한 법대의 안경환 학장을 향했습니다. 안학장은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입학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장애를 지닌 학생 한 사람을 위해서는 보통 학생들의 20-30배의 비용이 든다 합니다. 그는 다른 교수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최민석 군의 입학을 최종적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장애 학생들을 모아서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안 학장은 그런 자기의 노력이 "소외된 사람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놀랐습니다. 그는 성한 사람으로서 성치 못한 사람을 돕는다는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불편을 덜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공회대학교의 김성수 총장이 강의실에서 왼손잡이 학생이 글씨를 쓰느라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는 즉시 왼손잡이용 의자를 구입해서 강의실마다 준비하도록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공회대학교는 참 좋은 학교라는 편견을 갖기로 작정한 바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소수자들에 대한 이런 관심은 한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아주 소중한 씨앗입니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만들고, 사람들의 발 앞에 있는 걸림돌들을 치워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택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도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금씩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노력이야말로 길을 만드는 행위이고, 거치는 것을 제거하는 행위이겠기에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품성을 닮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먼저 마음을 풀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위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의 발 앞에 있는 걸림돌들을 치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걸림돌을 치우는 순간, 우리 마음에 드리워있는 구름도 걷힐 것이고, 우리를 무겁게 만드는 쇠 항아리도 찢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가 봄바람처럼 우리 곁에 찾아들 것입니다. 높이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이 소망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심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2월 15일 13시 36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