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삶에는 은퇴가 없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빌립보1:20-26
설교일시 2004/2/22
오디오파일 S040222.mp3 [298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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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은퇴가 없다
빌1:19-26
(2004/2/22)

● 한 소망의 사람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무엇'에 대한 소망이 우리의 삶을 힘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25살의 젊은이 윤동주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남겨준 시구가 하나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가끔 우리는 자기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노라는 호언장담을 듣습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움은 숨기고 싶었던 뭔가가 확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마음과 삶이 따로 놀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런 불일치, 자기 분열이야말로 타락한 삶의 특색입니다.

옥중에 있는 바울 사도는 자기의 소망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이 말은 안팎이 일치된 삶을 살겠다는 자기 결의입니다. 둘째,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올인(all-in)한 사람입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것은, 그의 삶이 곧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수족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살면서 성도라 자칭하는 것은 '검은 백마'라고 하는 것처럼 형용모순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말은 자기 삶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그리스도이기에 죽음조차도 그분과의 결합에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돈을 위해 사는 이에게 죽음은 '허무로의 소환'이고, 명예를 위해 사는 이에게 죽음은 '대중들에게 잊혀짐'이고, 권력을 위해 사는 이에게 죽음은 '영향력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결합'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쏘는 가시는 이미 제거되었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그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의 삶이 어찌 자유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살아있음의 의미
그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떠난다'는 단어는 배가 묶여 있던 줄을 풀고 항해에 나선다, 죄수가 석방되어 감옥을 떠난다, 소가 멍에에서 풀려난다고 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죽음은 해방인 셈입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의 그의 소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명이란 성도들을 더욱 발전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과 믿음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나의 있음이 너희의 유익이 된다." 바울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나의 있음'이 그의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항상 이런 소망을 품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제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남 좋을 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고, 웃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박옥식 전도사님은 이런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사실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시인 도종환 씨가 지병으로 교단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신경계 계통의 질병이라는 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학생들 곁을 떠나는 그의 마음이 참 아플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시 <가죽나무>는 자기 삶을 돌아보는 시인의 자화상 같습니다.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도종환, <가죽나무> 부분)

대들보로 쓰이지도 못하고, 좋은 재목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있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살려고 애써온 시인의 살뜰한 정성이 귀하게 생각됩니다. 어쩌면 박 전도사님도 이 시의 내용에 크게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위대한 첼리스트인 카잘스의 전기를 읽다가 아름다운 장면을 만났습니다.

지난 생일(1969년 12월 29일)에 나는 아흔 세 살이 되었어요. 물론 젊은 나이는 아니지요. 사실 아흔 살보다는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이란 상대적인 문제잖아요. 만약 여러분이 계속 일을 하면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반드시 늙는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걸 여러분도 알게 될 겁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그래요. 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감동하고, 삶은 갈수록 더 근사해지니까요. (앨버트 칸 엮음,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중에서)

● 신열처럼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
우리 인생은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한 세상, 이왕이면 잘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잘'이라는 부사입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잘 살기 위해서는 목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끄럼 없이 살기를 원했고, 살든지 죽든지 온 몸으로 그리스도의 존귀를 구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같은 목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강렬한 희망은 무엇입니까? 신열처럼 여러분을 들뜨게 하고, 때로는 일으켜 세우는 힘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큰 일은 하지 못해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몸과 마음을 다 담아 감당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남아 있는 세월이 얼마이든 우리의 '있음'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그리고 이 척박한 역사 위에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2월 22일 14시 07분 4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