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 이상한 자랑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12:1-10
설교일시 2004/3/7
오디오파일 s040307.mp3 [569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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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자랑
고후12:1-10
(2004/3/7)

● 자랑의 심리학
팔불출이라는 단어를 컴퓨터에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이들의 모임이 있더군요. 그래서 들여다보니까 재미있었어요.
· '저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꼴찌를 해보았습니다. 전교 일등보다 더 어려운 꼴등…'
· '전 남자답고 멋지게 생겼슴돠. 어쩌다 거울 보면 내 얼굴에 감탄할 정도죠. 근데 내 친구들은 씩 하고 약간 쓴웃음을 짓더군요. 어떤 의미든 상관 없슴돠. 난 이렇게 생각할람니다. 짜식들 내가 잘생겨서 질투하는군!!! 하하하'
· '전 다른 사람에 비해 아이큐도 높고, 말싸움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고, 게다가 귀엽게까지 생겼답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원망되시지요?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사회적 억압이 얼마나 컸으면 젊은이들이 이런 사이트를 만들어놓고 스스로를 격려하겠어요. 그러니 우리도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이런 잘난 척들은 유머러스한 악의 없는 자랑들입니다. 그냥 들어주면서 '그래, 그래' 하고 긍정해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는 자랑도 많습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고, 남을 멸시하려는 사람의 헛된 자랑에 대해 예레미야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자랑의 심리학에 대해서 저는 깊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뿌리깊은 열등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면에 힘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하지만 내면이 허전한 사람들은 항상 외부로부터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큰 자동차를 타고,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그것을 통해 자기를 크게 보이려는 뽐냄의 욕구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는 이들조차 자기가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경험했습니다. 좋지요, 미지근한 교회보다는요.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성령 받은 자들처럼 살지 못하고, 옛 생활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체험은 일상의 성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 체험이 못난 자아와 결합할 때 그것은 더욱 나쁜 경향을 만들어냈습니다. 성령 체험을 통해 자기 부정과 겸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만에 이르게 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을 남의 체험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 남의 말하듯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외적인 체험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증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그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섬김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부름입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 은사의 문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신령한 말, 즉 방언에 매료되더니, 다음에는 신비한 시각 체험에 사로잡히고, 더 나아가서 신비한 청각 체험에 미혹되었던 것입니다. 체험 그 자체에 탐닉할 뿐 존재의 변화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처럼 곤란한 것이 없습니다.

신앙에는 분명히 신비의 차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비 체험은 신비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산에 올라갔던 모세는 백성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는 산 아래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 눈보다 희게 변화된 주님의 모습이 얼이 빠졌던 베드로는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귀신들린 소년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체험이 비근한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육화되느냐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우리가 뒤엉켜 살아가는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갈까 늘 고민합니다. 거룩의 체험은 그러니까 탈속적인 삶으로 우리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잘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좋은 이웃이어야 하고, 좋은 시민이어야 하고,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 체험의 진실성은 생활의 변화를 통해 검증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달아오른 이들에게 이런 말은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이 자기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를 자기는 알 도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감히 발설할 수 없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임이 분명한 그 사람은 정말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않습니다. 말의 부질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다소의 영적인 체험을 하고 난 후에 '들었노라, 보았노라' 하는 이들은 대개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거기에 현혹되다보면 우리는 간과 쓸개를 다 빼 먹힌 허깨비가 되고 맙니다.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는 이들의 태반이 일상의 삶에서 좋은 이웃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바울은 단순하게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체험을 말할 뿐 거기서 보고들은 것은 한사코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 체험에 집착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돈을 주고라도 성령의 은사를 사려고 했던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같은 사람(행8:18-24)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불행한 사람
그런데 다시 한번 묻습니다. 왜 바울은 자기의 체험을 남의 말하듯 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6절 뒷부분이 그 답입니다.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이게 바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지나치게 크게 생각할까봐 자랑하기를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누가 불행한 사람입니까? 자기가 한 것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아닐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기 만족에 빠짐으로써 교만하기 쉽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신상을 지고 가던 나귀가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자꾸 절을 하는 거예요. 녀석은 신이 나서 자꾸 발을 들어서 인사에 답례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나귀몰이꾼이 녀석의 어깨를 자꾸 누르면서 제발 좀 일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겨우겨우 사원까지 가서 신상을 내려놓고 빈몸으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절을 안 하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어 먼저 인사를 해보려고 발을 들었다가 나귀몰이꾼한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아까야 신상이 떨어질까봐 팰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그렇겠어요. 사람은 그 나귀처럼 망자존재(妄自尊大)하기 쉬운 존재예요.

둘째, 자기 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기 쉽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라야 겸손하게 남에게 배우려 하는 데, 분수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려고 할 뿐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셋째,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날까 두려워 늘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그는 자기 올무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늘 뭔가를 숨겨야 하니까요. 진실처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진실은 '안팎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는데, 저는 그것을 '진실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고쳐 읽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행여라도 자기가 분수에 넘치는 평가를 받을까 저어하는 바울에게서 우리는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 약한 것을 자랑함
바울은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약한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숨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의 약한 것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아주 고질적이고 치명적인 병에 시달렸습니다. 어찌나 괴로웠던지 그는 그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그 병에 시달릴 때마다 하나님께 그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남의 병도 곧잘 고치는 그가 병에 시달린다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 것 같았기에 그의 기도는 더욱 절박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는 떨쳐버리고 싶었던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런 가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병은 오히려 그의 마음이 교만의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또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세상에 들어오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악조건을 호조건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찬송가 503장 2절은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우리의 약점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약한 때 오히려 나는 강합니다.' 지금 이런저런 가시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가시는 제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가시는 어쩌면 더 큰 은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더 좋은 생의 조건을 갖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 길에서 우리의 못난 자아는 점점 작아지고, 믿음은 더욱 커져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인격들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3월 07일 15시 43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