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마음의 자취를 따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17:9-13
설교일시 200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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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취를 따라
렘17:9-13
(2004/3/14)

● 心無常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의 제3막에서 만토바 공작이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 중의 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 가사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변하기 쉬운 게 어디 여자의 마음뿐입니까?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은 것은 남녀를 떠나서 바로 인간이라는 종의 모습이 아닐까요? 마음은 그리 믿을 만한 게 못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의 자기와 현실의 자신이 얼마나 다른가를 소름끼치게 자각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

마음으로는 하루에도 집을 수 십 채씩 지었다 허뭅니다. 가장 거룩한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천하에 없이 타락한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 일에도 매이지 않은 사람처럼 당당하다가도, 사소한 일에도 전전긍긍합니다. 거대한 바위는 곧잘 넘으면서도 작은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무책임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말이 어쩌면 가장 정직한 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사람들은 心無常이라 했습니다. 마음은 덧없다는 말일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무상한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다가는 우왕좌왕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三毒이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탐욕貪慾, 진에瞋 , 치정癡情이 그것입니다. 잘 인간의 욕심은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습니다. 차지 않는 그릇을 채우느라 우리는 늘 긴장상태에서 분주하게 삽니다. 진에는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주 이런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목을 잡고 이 세상에 나왔다지요? 어쩌면 우리도 다 '잠재적인 야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을 덜 미워하고 화내는 일이 적은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또 다른 독은 '치정'입니다. '癡'는 어리석음인데 여기에 '情'이 결합되면 '옳지 못한 관계로 맺어진 남녀간의 애정을 뜻하게 됩니다. 이 문제도 참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인간은 참 어리석어서 향락에 즐겨 빠집니다. 인간이 정신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몸이 되어 살아갑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췌장암 말기 환자의 잔잔한 마무리를 지켜봤습니다. 그에게 남은 세월은 기껏해야 한 두 달이라는 데 그는 참 평온한 표정이었습니다. 왜 늘 웃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제 얼마 후에 자기가 떠나더라도 남겨진 아이들은 아빠를 늘 웃던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더군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평온함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 얼굴은 삼독의 독기가 다 빠진 이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 얼굴은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천진한 얼굴이었습니다.

● 잃어버린 마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9)

우리는 이 사실을 별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바르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죄인 괴수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 '영원히 죽게 될 내 영혼 구하려 주께서 십자가 지셨네' 하고 은혜스럽게 찬송을 부르다가도 누군가가 나를 가리켜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싸우자고 덤비는 게 우리입니다. 찬송은 찬송이고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수오재기守吾齋記('자아를 지키는 서재의 이야기')라는 글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가운데 으뜸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밭이나 집, 나무는 누가 훔쳐갈 수 없고, 책이나 곡식을 훔쳐갔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이 일정하지가 않고…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데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익과 녹봉이 유혹하면 그리로 가고, 위엄과 재화가 위협하면 그리고 간다. 질탕한 상조商調나 경쾌한 우조羽調의 흥겹고 고운 소리를 들으면 그리고 가고, 새까만 눈썹에 흰 이를 가진 아름다운 미인을 보면 그리로 간다. 그리고 한번 가면 되돌아 올 줄을 몰라 붙잡아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니 끈으로 잡아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조정에 출사했다가 모함을 받아 강진에 귀양살이를 가서야 비로소 그는 자기가 마음을 잘못 간직하여 잃어버린 채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마음의 자취를 되짚어가며 자기 마음을 찾아가 가만히 그의 곁에 머물렀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월이 본딧마음을 잃어버린 세월이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고 권고합니다. 자기의 본딧마음을 지켜야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 자꾸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돌아보는 것을 가리켜서 반성, 혹은 성찰이라고 하지요?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남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반성이나 성찰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 심장과 콩팥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0)

하나님의 눈길은 우리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의 말솜씨에 넘어가시는 법도 없고, 우리가 짓는 불쌍한 표정에도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주중에 모처럼 병원에 갔습니다. 환자 심방은 많이 해보았지만 스스로 진료를 받으려니 좀 긴장이 되었습니다. 초음파검사와 내시경검사를 받으려고 대기하는 동안 나는 씁쓰레한 미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중간평가를 받는 자리인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나의 장기는 내가 살아온 자취를 고스란히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도 부담스러운 데, 하물며 하나님의 눈길은 어떠하겠습니까?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신다 하는데, 히브리인들은 심장이 '정서적 감각의 원천'이고,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기능'을 관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은 삶의 결단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심장을 살피신다'는 말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중심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게 돈인지, 명예인지, 권력인지, 쾌락인지 아니면 하나님인지를 말입니다. 여러분의 심장에 하나님이 좌정하여 계신지 한번 살펴보세요.

'폐부를 시험하신다' 할 때의 '폐부'는 '콩팥'을 뜻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콩팥'은 양심의 소재지입니다. 예레미야 12장 2b절은 악인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멀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것이 바로 '콩팥'입니다. 악인들은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제 아무리 그럴싸하게 그리고 빈번히 말한다 해도, 그들의 내적인 결단에 하나님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이 지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예레미야는 자고새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 淸淨心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얼핏 붉은머리오목눈이의 둥지에 알을 낳아 알을 품게 하고 포육시키도록 하는 뻐꾸기의 탁란托卵(deposition, brood parasitism) 과정이 떠오릅니다. 제 몸집보다 더 큰 뻐꾸기 새끼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주고, 나중에는 뻐꾸기가 미련없이 떠나는 걸 지켜보는 붉은머리오목눈이를 보면서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교훈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얻는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속절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13절에서는 마음내키는 대로 살다가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된다고 했습니다. 흙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상함을 뜻하겠지요? 바닷가 모래 위에 쓴 글씨를 생각하면 됩니다. 파도가 한 번 밀려오면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우리 삶의 자취를 새기고 있습니까?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의 길은 탐·진·치를 쫓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숨은 턱에 차 오르고,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은 일그러지고, 다리는 휘청거리면서 살아온 우리 삶은 과연 무엇을 쫓던 삶입니까? 이제 삶의 주권을 주님께 넘겨드립시다. 그분이 이끄는 대로 살아봅시다. 내 마음대로 살지 말고,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를 온전히 바치며 사십시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주님을 성소로 삼는 삶이요, 그분을 소망으로 삼는 삶입니다. 잠언 19장 21절의 말씀이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이 사순절기에 잃어버렸던 우리 마음을 되찾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고,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깨끗한 마음(淸淨心)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을 보았습니다만, 본딧마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은 없습니다. 우리의 순간순간이 깨끗한 마음을 되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3월 18일 14시 40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