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대하19:4-7
설교일시 200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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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
대하19:4-7
(2004/3/21)

● 어떤 존재로 기억될 것인가
지난주간에 춘천에 다녀왔습니다. 새벽과 밤으로 신앙집회를 인도하고, 오후에는 여기저기 유람하며 보냈습니다. 의암호 주변, 김유정 문학촌, 그리고 고려 건국의 공신인 장절공 壯節公 신숭겸 장군의 묘소가 참 좋았습니다. 신숭겸 장군의 묘소 앞 잔디밭에 퍼질러앉아 듣는 솔바람 소리는 일품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죽음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왕건의 의형제인 신숭겸 장군은 후백제의 견훤군과 대구 공산에서 접전할 때 왕건이 위험에 처하자, 자신이 왕의 옷을 입고 왕의 마차를 타고 전투에 나갔다가 후백제군의 집중공격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사이에 왕건은 적진을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왕건은 나중에 머리가 잘린 신숭겸 장군의 시신에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장사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조 왕건은 그 두 장군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짚으로 두 장군의 형상을 만들고 관복을 입혀 앞에 앉히고는 술을 권했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신 장군의 묘역에는 봉분이 셋인데, 그 까닭은 도굴을 피하기 위해서랍니다. 고려 16대 예종 임금은 서경의 팔관회에 참가하여 신숭겸, 김낙 두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직분職分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功臣이여
오래오래 곧은 자취는 나타내신져.

어쩌면 그들은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오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떠나고 난 후에 남는 것은 그에 대한 기억뿐입니다. 신숭겸 장군은 '오래오래 곧은 자취'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 신실한 개혁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여호사밧 임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他山之石이 됩니다. 아사의 뒤를 이어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 여호사밧은 자기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영토의 곳곳을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처에 산재해있던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찍어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세심히 돌보고, 그들의 억울한 처지를 신원伸寃해주는 해방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명해 인간들이 빚어낸 불평등과 차별을 원상 회복시키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저버리고 풍요와 다산의 신 앞에 엎드렸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나라가 바로 서는 길임을 알았기에, 백성의 지도자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들을 각처에 보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든든하게 서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웠던 것입니다. 척추가 곧아야 몸이 건강하듯이, 우리 정신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해 바로 세워질 때 역사는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정신이 바로 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신앙에 바로 서면 우리는 우리를 든든히 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역대기 사가는 여호와께서 여호사밧의 손에 나라를 굳게 하시고, 온 유다 백성이 그에게 예물을 드려 부귀와 영광이 넘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두려움이 사방에 있는 여러 나라에 임해서 그들은 유다를 상대로 하여 싸움을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오히려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 정략에 따른 정치가
여호사밧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지만 역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기획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려고 했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의 평화체제를 구축할 목적으로 아합왕과 사돈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맺어주었습니다. 일종의 정략 결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눈밖에 난 아합 왕가와의 연혼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왕을 찾아갔을 때 아합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는, 아람 땅인 길르앗 라몬을 치는 데 동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호사밧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쉽게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거절했다가는 모처럼 맺은 동맹관계가 깨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뜻에 여쭈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이스라엘 왕을 섬기는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 앞에 불려왔습니다. 시드기야를 대표로 하는 400인의 예언자는 아합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말합니다. 왕의 권위 앞에서 '예'라고 밖에 말 못하는 관제예언자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짖지 못하는 벙어리개요, 분별력 없는 목자들(사56:10-11)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로운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해도 참 예언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선지자 미가야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그 자리에 불려나와서는 거짓말하는 영이 그 예언자들의 무리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면서 아합왕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왕의 얼굴은 붉어졌고, 모욕감을 느낀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대하18:23)고 으르댑니다. 결국 미가야는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갇히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여호사밧은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아합의 청을 거역할 수 없어서 전투에 나갑니다. 아합은 병졸의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여호사밧은 왕의 옷을 입고 왕의 마차를 타고 참전합니다. 아람 사람들이 왕을 보고 일제히 달려들자 여호사밧은 큰소리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는 사지를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합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그날 해가 질 무렵 전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 돌이켜 굳게 붙잡음
예루살렘으로 황급히 귀환한 여호사밧 앞에 선지자 예후가 나와 그를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나이까?"(대하19:2) 선지자는 왕이 그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행실을 기억하셔서 진노를 유보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살아있는 것은 우리의 작은 선행을 크게 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덕분입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사람의 지혜로운 것보다 낫다는 말씀을 실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고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여호사밧은 자기의 정치적, 정략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지만, 잘못을 알아차리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위대한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대하20:15) 하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전쟁에 나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서 그가 사용한 전술이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예 군사 앞에 거룩한 예복을 입은 찬양대원들을 배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고 찬양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진실한 찬양은 세상의 힘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사람들이 밝혀든 평화의 촛불, 그 꺼지기 쉬운 촛불 하나의 힘도 엄청난데,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사람들
여호사밧은 무너진 공직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브엘세바에서 에브라임 산간지역까지 민정을 살피러 다녔고, 사람들을 조상의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 성마다 재판관을 세워 백성들 사이에 억울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는 재판관들이 가져야 태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대하19:6-7)

지금 우리는 역사상 매우 중대한 국면에 서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합니다. 우리는 헌법재판소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판결을 하기 바랍니다. 불의하지도 않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사밧도 사람이기에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실수도 하고 죄도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았고, 또 하나님께로 돌이킬 줄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여호사밧의 이름은 "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험난한 역사적 혼란기에 의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그러나 확고하게 따라야 합니다. 이 척박한 한반도의 역사 속에 '여호사밧'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지도자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도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힘있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3월 21일 16시 57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