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3. 거기 너 있었는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53:1-7
설교일시 2004/3/28
오디오파일 s040328.mp3 [552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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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사53:1-7
(2004/3/28)

사순절 순례의 길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잘 걷고 계십니까? 아니면 애초의 마음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이전의 습관에 따라 비틀거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걸어가신 사랑의 길, 그 자기 희생의 좁은 길 저편에서 우리는 영생의 문을 봅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영생의 문을 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생은 섬김과 희생과 나눔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주님은 수난의 길을 걸으셨고, 우매한 인간의 역사가 안겨준 쓰디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인생의 실패자처럼 보이고 패배자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 고난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진리이심을 드러내셨고,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 되셨습니다. 어쩌면 우주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꽃 한 송이를 얻기 위해 전개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잘 아시지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시인은 가을 하늘 아래 피어나는 국화꽃 한 송이 속에서 우주적인 신비를 보고 있습니다. 꽃 한 송이를 피워내기 위해 봄을 선구하는 소쩍새의 울음이 필요했고, 먹구름을 찢는 천둥소리가 필요했고, 가을날의 무서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인의 감성을 보면서, 그게 과학적인 근거가 있냐고 묻는 사람은 없겠지요? 이 시는 세상의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을 기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너' 없는 '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삶은 너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 라멕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세상
우리는 오늘 수난으로 점철되었던 유다의 역사가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로 알려진 이 본문의 울림은 참으로 깊습니다. 이 노래 하나를 얻은 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의 수난의 역사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난을 많이 겪다보면 사람은 정신적으로 강인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허약해져서 신세타령을 하거나, 누군가에 대한 원망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중국의 작가 노신의 작중인물인 '아 Q'처럼 자신의 잘못을 항상 남의 탓으로 돌리고, 권세 앞에서는 비굴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아름다운 정신의 진주를 빚어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눈물로 빚어낸 아름다운 진주,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고난을 눈물로 반죽해 이런 보석 같은 노래를 빚어낸 민족이 오늘 테러리스트들처럼 변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과연 하나님을 믿는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폭력적입니다. 지금 그들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버리고, 라멕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창4:23)

라멕은 카인의 후예들의 삶을 대변합니다. 되로 받으면 말로 되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기어코 되돌려 주려는 것이 미움과 폭력이니 문제입니다. 사순절 순례의 길에서 우리가 고난받는 종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세상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이는 어떤 분입니까?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
그는 마른땅에서 나온 싹과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어서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고, 이런 저런 병에 시달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맙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 매력적인 용모의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젊은이들의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세상입니다. 인고하며 살아온 세월의 더께인 주름살이 싫어서 돈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은 '어머니'라는 이도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소 감상적인 분위기를 띠게 됩니다. 자식이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것은 언제입니까? 그것은 철이 들 때입니다. 어머니 머리에 흰 이슬이 내리고, 주름살의 골이 깊어지고, 기력과 기억력이 줄어드는 때입니다. 어머니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어머니의 모습 속에 배어있는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모습을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서양 미술의 영향으로 우리는 금발머리에 눈동자가 파랗고 콧날이 오뚝한 모습의 예수님을 마음속에 그리곤 합니다만, 그건 정말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가난한 동네 나사렛에서 살았던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노동으로 단련된 주님의 손은 거칠었을 것이고, 그분의 입성이 남루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종교적인 엘리트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그야말로 스캔들입니다. 요즘 멜 깁슨 감독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12시간을 극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영화라지요? 피범벅이 된 채 죽어가는 예수님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다가 죽은 분도 있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을 당신의 무기력한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잔혹성과 폭력조차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의 고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혹합니다. 사람들은 다 눈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야말로 생명의 문입니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고난받는 종은 자기의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마치 아사셀에게 바쳐지는 염소와 같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레위기 규정에 의하면 제사장 아론은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런 다음에는 일을 맡은 사람이 그 숫염소를 끌고 광야로 나갑니다. 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가는 것입니다(레16:21).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행과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길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고난받는 종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욕심을 섬기는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땅의 일에 탐닉하는 우리의 죄를 주님은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서른 세 살 젊은이의 그런 희생은 모자람 없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대신하여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고 계십니다. 이 가없는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느껴지십니까? 이 사실을 알고 살아야 사람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오오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울 때 우리는 교만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조금만 겸손하게 돌아보면 우리 삶은 온통 사랑의 빚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사실을 깊은 몸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염려하여 사랑의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분들,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덜어주려고 마음 쓰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됩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 잠잠한 양 같이
고난받는 종은 자기의 고통을 인하여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는 고요합니다. 빌라도 앞에 선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말의 부질없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요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폭력적인 세상조차도 사랑으로 얼싸안으려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난받는 종은 쇠붙이를 품에 안아 녹일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었기에 잠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근원적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입니다. 악을 사랑으로 응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정신을 다소나마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 잘 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다 보면 우리 정신은 자꾸만 작아집니다. 그게 타락입니다. 마음을 넓히십시오. 그리고 고요해지십시오. 하나님의 뜻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교우 여러분, 사순절 여정에서 이 큰 정신과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맛보려는 갈망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우리가 경험한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스스로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의 아픔에 눈을 뜨십시오. 살아있음이 은총임을 깊이 자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십시오.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대하십시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여름가을겨울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 삶의 온갖 경험들을 가지고 부활과 영생의 꽃을 피우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3월 30일 10시 06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