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4. 지금도 섬기시는 주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2:24-30
설교일시 20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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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섬기시는 주님
눅22:24-30
(2004/4/4)

● 진정한 기쁨
마당가 화단에 솟아나는 화초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인 것처럼 화단을 찬찬히 들여다 볼 때면 경외심이 차오릅니다. 겨울 추위를 견뎌낸 씨앗과 뿌리들만이 생명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대견하구나' 격려를 하다가 문득 어떤 눈길을 느꼈습니다. 내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는 주님의 눈길이었습니다. 도무지 자라지 않는 나의 믿음이 떠올라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원하면서도, 변죽만 울리는 삶이 안타깝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소리 없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바깥으로만 나도는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커지기를 원합니다. 한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초등학교 5-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양쪽 무릎에 침을 꽂은 채 저를 멀뚱멀뚱 바라보았습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키 크려고요" 하고 대답합니다. 아마 성장판을 자극하는 침이었던 모양입니다. 밤톨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 아이는 친구들에 비해 작은 키가 부담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됩니다. 학생들이 밤잠 안 자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남달라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커지는 것이 곧 성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평균적인 속도에 뒤쳐지면 인생의 낙오자로, 실패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전쟁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보이지 않는 전선입니다.

그런데 정말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행복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 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자기의 강함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쁨은 자기의 강함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이 있을 때 성립합니다. 그래서 그런 기쁨 혹은 쾌락은 상대적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옵니다. 자기와 싸워 이긴 사람이야말로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찬탄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 集中이 아니라 執中의 삶을 향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섬김의 삶을 가르치시고, 또 가리켜 보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존심을 꺾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근원적인 기쁨입니다. 그리고 자유입니다. 힘에 눌려서가 아니라, 지위에 눌려서가 아니라, 돈에 눌려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깃든 사랑과 고마움 때문에 섬기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기쁨과 행복을 경험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3년씩이나 주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이건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의 중심을 붙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집중'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풀어보면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을 集에 가운데 中을 합친 集中은 오직 한 가지 욕심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기 원하는 마음이야말로 集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집중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잡을 執에 가운데 中을 합친 執中입니다. 이것은 '가운데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아집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점을 잡는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몰두하는 사람은 진리라는 '中'을 잡을 수 없습니다. 진리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이라야 남을 진심으로 섬기며 살 수 있습니다.

후배이지만 만날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후배 목사가 있습니다. 함양제일교회의 양재성 목사입니다. 그는 조용합니다. 언제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엄숙하지는 않습니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지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듭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그는 자기 집인 듯 편안합니다.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면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줍습니다. 버리고 간 사람에 대한 불평도 없습니다. 함께 걷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는 아주 잘 듣는 사람입니다. 또 그는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한 두 번 해보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그 일을 해냅니다. 그는 언제나 섬김의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짐을 느낍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유언을 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바로 이것이 '가운데를 붙잡은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은 사람, 아니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못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섬깁니다. 섬기는 사람은 곧 살리는 사람입니다. 북돋는 사람입니다. 누가 섬길 수 있습니까? 정신이 큰 사람만이 진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정신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섬기지 못합니다.

● 섬기는 자로 살기
예수님을 믿는 이의 삶은 섬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섬기는 자로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우리도 섬기는 자로 살아감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섬기지 못하는 것은 왜 입니까? 절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살겠다는 마음의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속에 쌓인 감정과 정념의 찌꺼기들을 보면서 놀랍니다. 의식적으로는 해결되었다고 믿었던 문제들이 내 속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해신 것처럼 제 마음도 정화시켜 주십시오. 깨끗해질 수만 있다면 채찍질이라도 견디겠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과 같이 제 마음에도 느릿느릿 걸어들어와 왕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에 평화를 주십시오.'
―'집착하고 있던 것들을 놓게 하시고, 오로지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만족을 얻게 해주십시오.'

제가 오늘의 본문에서 정말 놀라는 것은 그렇게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영적으로 닫혀 있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이 얼마나 큰사랑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시기는커녕, 당신의 왕권을 우리에게 넘겨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이 믿음을 저버린다면 우리에게 영생은 없습니다. 때때로 주님과 함께 걷는 길에 어려움도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겪는 시련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욱 굳세게 비끄러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삶이 힘겨워 비틀거릴 때에도, 이웃과의 갈등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절기에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섬김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며 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임재를 뜨겁게 경험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4월 04일 16시 32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