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6. 머릿돌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4:5-12
설교일시 2004/4/18
오디오파일 s040418.mp3 [5711 KBytes]
목록

머릿돌
행4:5-12
(2004/4/18)

● 증거로 선 사람
생의 반전은 때로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이후 가슴에 뜨거운 불을 품고 있던 베드로는 그날 성전을 향하면서 자기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전 문 앞에 당도했을 앉은뱅이 걸인도 그날이 운명의 반전이 일어나는 날인지 도무지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만남도 있지만, 우리 생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기는 만남도 있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을 보았을 때 베드로의 속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아픔이 고스란히 자기의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 가련한 사나이 앞에 멈춰 섰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작정도 없었을 겁니다. 주머니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뭔가를 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단호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그리고는 오른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기력하게 흔들거리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베드로의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가련한 사나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베드로는 자신의 진정을 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물질은 때로 진실한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물질이 발하는 휘황한 빛은 서로의 진정을 살피지 못하도록 만들 때가 많습니다. 물질을 매개로 한 만남은 처음에는 뜨겁지만 곧 식어버리고 맙니다. 영국의 축구 스타인 베컴은 바람둥이입니다. 그는 자신의 외도 때문에 상처 입은 아내를 위로하려고 21억 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답니다. 그것으로 아내의 상처가 아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를 가슴으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부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면서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분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에 도취되어, 자신이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영적인 교만이 그의 마음에 깃들기 시작합니다. 복이 화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전혀 들뜬 표정이 없습니다. 즉시 자기 자신을 지웁니다. 자신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영아들은 뭔가를 가리켜 보이면 그 손가락을 바라본다지요? 그런데 돌 무렵이 되면 손가락이 지시하는 대상을 바라본답니다. 영아기를 벗어난 신앙인은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역할의 뒤집힘
성전에서 일어난 소란을 핑계로 성전 체제를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나아와 베드로 일행을 체포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들의 내심의 동기를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이가 남자만 오천 명이 넘었다는 보도입니다. 날이 환히 밝아왔는데, 지도자라는 이들만 잠옷을 입고 있는 격입니다.

이튿날에 산헤드린 공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들은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어 무덤에 갇힌 예수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었고, 제자들은 공공연하게 예수의 이름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연 것입니다. 낯 색이 창백하고 손이 매끈한 그들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교만하고 위압적인 어투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들은 먼저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고친 일을 두고 심문을 시작합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온전한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던 한 인간이 회복된 이 놀라운 사건을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제자들에게 면허증을 제시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다는 절차상의 문제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게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베드로는 명백히 그들의 권한을 침범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베드로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노동으로 살아온 베드로의 구리빛 얼굴은 평온합니다. 노동으로 단련된 손마디처럼 거칠고 투박한 그의 음성에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또박또박 힘있게 대답합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는 자신의 죄목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는 가시가 담겨있습니다. 한 존재를 회복시킨 '착한 일'이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는 그것을 문제삼는 이들의 어둠을 폭로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 곁에 있을 때 늘 딴소리를 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운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 비결은 8절에 나오는 '성령에 충만하여'라는 한 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성령은 베드로 속에 있는 두려움과 무기력을 확신과 능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령은 그를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는 심문의 자리를 증언의 자리로 삼았습니다. 피고와 원고가 뒤바뀐 셈입니다. 그는 지도자들이 어둠 속에 유폐시키려던 예수의 이름을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이름뿐이 아닙니다. 그의 생생한 현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 위대한 건축자
베드로의 증언이 계속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지도자 소리 듣기 좋아하는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건축자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리석은 건축자들입니다. 자재를 분별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긴요한 자재를 내팽개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셨고, 그를 새로운 역사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한사코 부정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쓰라림을 부활의 기쁨과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것도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많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애초부터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벗어남의 이유가 개인적인 성향일 수도 있고, 어떤 환경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중국의 작가 노신은 우리에게 '썩은 사과 먹는 법'을 가르칩니다. 사과가 썩었다고 해서 그것을 송두리째 내버리지는 않습니다. 알뜰한 사람은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성한 부분을 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마다 문제가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제와 허물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도저히 함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문제와 허물에 시선을 빼앗겨서, 좋은 부분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신 것은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허물이 있지만 우리 속에 있는 작은 가능성을 크게 셈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보여주신 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 예수, 그 아름다운 이름
그래서 베드로는 마침표를 찍듯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온전하게 되는 것, 즉 전인격적인 건강함을 뜻합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아시다시피 그의 존재를 뜻하는 말입니다. 히브리들인도 그리스인들도 이름을 한 존재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도 기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러니까 예수라는 존재이고, 그 존재가 드러난 삶이고 가르침입니다. 예수처럼 살려고 애쓰지 않고는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안합니다. 그리고 당당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결단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부족함을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가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삼아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길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 아름다운 부활의 절기에 우리들의 가슴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흔흔해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4년 04월 18일 16시 44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