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7. 믿음이 곧 길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14:10-16
설교일시 200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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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곧 길이다
출14:10-16
(2004/4/25)

● 바로의 후회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선택이고, 선택은 취할 것(取)과 버릴 것(捨)을 가리는 것입니다. 삶이란 모호한 것이기에 우리의 선택이 늘 옳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 그 인연을 소중히 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 기회를 꽉 잡아야 했는데', '그를 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 없이 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든지, 망각의 결과이든지, 자기 합리화의 과정일 것입니다. 저는 많이 후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후회도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후회가 퇴행적인 삶을 부른다면 그건 이중의 실패입니다. 물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의 목적은 바른 길을 찾아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종류의 후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후회입니다. 열 가지의 재앙을 경험하면서 그는 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광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썰물처럼 애굽을 떠나 광야로 향했을 때 뒤늦은 후회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대제국의 왕으로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 받기까지 하는 자기가 제대로 힘 한번 못 써보고 굴복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14:5)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은 애굽의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곧바로 바로의 지도력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질 것이고, 민심은 급격히 이반될 것임을 그는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군사 동원령을 내립니다. 장군들로 하여금 특별 병거 육 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몰고 나가 히브리인들을 몰아오라는 것입니다. 무장도 하지 않고, 군사 훈련도 받지 않은, 그리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뒤섞여 있는 노예들을 붙잡기 위해 이런 군사력이 꼭 필요했을까요? 아닐 겁니다. 바로는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백성들에게, 히브리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말입니다.

● 백성들의 후회
후회하는 것은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풍을 떠나듯 흥겹지는 않았겠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의 마음은 어지간히 설레었을 것입니다. 갈대 바다 옆에 진을 치고, 좋은 꿈꾸라고 서로 축복하면서 잠자리에 들 무렵, 그들은 멀리서부터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젊고 건강한 이들이 달려나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얗게 질린 채 진영으로 달려옵니다. 큰 일 났다고, 이제는 다 죽었다고, 애굽의 군병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다고, 그들은 아예 울부짖으며 외칩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은 백성들을 급격한 공포와 두려움의 벼랑으로 몰아갔을 겁니다.

두려움은 일쑤 원망의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또 다시 노예의 멍에를 안기려는 바로와 그의 군대를 향하지도 않았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자유의 꿈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자기들을 그런 운명으로 인도한 모세를 향합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외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그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14:11)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자 자유의 금빛 꿈은 돌연 빛을 잃고 굴종과 생존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억압과 공포에 길들여진 노예들의 슬픈 모습입니다. 이것은 수 천년 전 중동의 변방에서 잃어난 몽매한 과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속물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괜히 어려움을 자초할 게 뭐냐고,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제일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을 굳이 모나게 살 게 뭐냐고, 타협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일 백 번 고쳐 죽어/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수가 있으랴' 하는 정몽주의 丹心歌보다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는 이방원의 何如歌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실상 자유의 길은 위험과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힘을 잘 압니다. 바로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들의 몸은 반응을 일으킵니다. 기억은 몸에도 새겨집니다. 매맞고 자란 개는 막대기만 보아도 꼬리를 사립니다. 구체적인 두려움과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후회와 원망과 아우성, 이건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어쩔 수 없는 히브리인들의 한계입니다.

● 모세의 선택
이제 바로와 백성들 사이에 서있는 모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두 얼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담대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모세는 출애굽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상기시킵니다. 계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끌어가실 분도 하나님이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참으로 대책 없는 믿음입니다. 말발굽 소리와 병거의 요란한 굉음에 비해 이 말은 얼마나 연약합니까? 아무리 억누르려고 애써도 속절없이 두려움이 찾아와 슬며시 그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백성들 앞에서는 그리 할 수 없지만 홀로 있는 자리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 해야 합니까?"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선택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자리에서 그는 처절한 고독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어둔 밤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14:15a)

그의 연약한 믿음에 대한 책망처럼도 들리지만, 이 음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약이기도 합니다. 부르짖음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었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의 마음에 들어와 두려움을 몰아내십니다. 밤이 낮보다 밝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밤에 영혼이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고독의 심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붙잡았습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겪게 마련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오직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 삶에 개입해 주십니다.

언젠가 들은 노래 가운데 '슬픔의 파도에 떠밀려도 희망의 해안에 닿는다'는 노랫말이 나옵니다. 모세는 두려움의 파도에 떠밀리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희망의 해안에 당도했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밀려 아우성을 치는 그 혼돈의 시간에 홀로 희망의 등불 하나를 밝히는 사람, 모두가 뒤로 돌아서 바로의 위세를 바라볼 때 홀로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사람, 바로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이들입니다. 이제 모세는 명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믿음이 곧 길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15b)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그들 앞에는 넘실거리는 물 밖에 없습니다.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따를 수 없는 명령입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거래가 아닙니다. 계산에 재빠른 사람들은 믿음의 길을 걷기 어렵습니다. 우직한 사람이라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오라'는 명령에 사납게 일렁이는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을 응답으로 알고 죽음을 향해 온 몸을 내던졌습니다. 百尺竿頭進一步, 이게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가 바로 등뒤에 닥쳐온 그 순간,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믿음을 요청 받고 있습니다. 순종에 이르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든지, 현실적인 위협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든지 이제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노예적인 굴종의 과거보다는 위험이 따르는 자유의 미래를 택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압니다. 그들 앞에 바다가 길을 열어 준 것을 말입니다. 믿음이야말로 길입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4.15 총선이 끝나고 이제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각 당이 애쓰고 있습니다. 보기 좋습니다. 진작에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제 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소의 혼란의 있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혼돈이 필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혼돈을 거치면서 우리는 더 큰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지요? 때로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인권이 유린되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존중되고, 몸과 마음에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 비정규직 노동자,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소외계층들이 인간대접을 받으며 사는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한 발을 물 속에 들여놓았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은 주님께서 이미 앞서 걸으신 길입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권능은 바로의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 이건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일을 보면서 이따금 속상할 때도 많지만, 마침내 정의를 이루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b)

등 록 날 짜 2004년 04월 25일 14시 21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