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8. 희망 발전소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6:9-12
설교일시 20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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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발전소
히6:9-12
(2004/5/2, 교회 설립기념 주일)

● 달리 생각하는 사람
교회 설립 75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교회 역사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묻는 이에게 75년이 되었다고 하면 '와, 오래되었군요' 하면서 탐색하는 눈빛을 보냅니다.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교회가 겨우 그 정도냐 하는 책망이 눈빛에서 느껴집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고, 크기가 아니라 실체이니까요.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금 어디로 부르고 계실까요? 마음의 눈을 뜨고, 영혼의 귀가 열려 보고 들어야 할 때입니다.

윤정덕 장로님은 참 에너지가 많으십니다. 70세가 넘었지만 청년처럼 뛰어다니시면서 젊은 목사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런 장로님이지만 차는 좀 신통치 않습니다. 장로님의 차는 가끔 방전이 되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차가 늙은 것인지, 처음부터 배터리 품질이 좋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장로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차 앞에 서 계실 때가 있습니다. 방전이 되면 시동을 걸 수 없고,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아무리 바빠도 차는 요지부동입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방전된 자동차처럼 무기력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의 비전을 잃어버린 교회는 무기력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충전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는 우리 속에 희망과 비전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르면서 땅의 중력에 매여있던 삶에서 놓여나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공급하는 희망 발전소가 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갑니다.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경기과열을 차단하기 위해 신규대출을 중단한다고 선언하자, 세계 증시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한 우리도 그런 영향을 전혀 무시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쪽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지금 '달리 생각하는 사람'(Andersdenkender)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지배와 소유로 구성된 기존의 삶의 틀을 깨뜨리고, 사랑과 섬김과 나눔의 삶을 즐겁게 유쾌하게 실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그런 일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는 발전소 하나랍니다. 물과 햇빛만으로 에너지를 만들어 스스로 살아가면서, 세상에는 산소를 되돌려줍니다. 우리도 믿음에 충실하다면 세상에 희망을 공급하는 발전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힘은 작지만 우리가 함께 모여 이룬 교회의 힘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 잠든 교회여 일어나라
그런데 많은 이들이 교회가 잠들어 있다고 탄식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인 데 그러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역동적이면 뭐합니까? 그 힘의 방향이 바르지 못하다면 말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을 책망하십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심의 대형교회는 부자입니다.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습니다. 초라한 집들이 올망졸망 늘어선 동네에 세워진 중세의 성처럼 거대한 교회당 건물을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탄식을 듣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괜한 트집이 아닙니다. 악담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양의 번듯함이 아니라, 바른 정신과 지향의 올바름입니다. 예수 정신은 늘 떠남 속에 있습니다. 안주하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어느 결에 제 삶이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이 제 귀에 쟁쟁하게 들려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롬2:28)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표범의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무늬는 안에 있답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정말 예수의 정신이 새겨져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욕망으로 질척하게 변해버린 땅에 내려오신 주님의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늘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할 거울입니다.

● 희망 발전소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 들어왔다가 옛 생활로 되돌아간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이 해이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살다보면 누군가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할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크나큰 격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잘 기억하실까요?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모두가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몸을 낮춰 다른 이를 섬기는 이들을 하나님은 귀히 보십니다. 어떤 이가 마더 테레사에게 "당신은 늘 어려운 이들을 돌보느라고 자기를 돌볼 겨를이 없는데, 때로 더 편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는 "남을 섬기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사람은 위를 볼 겨를이 없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행은 우리 삶의 조건이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행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를 바라보노라면 삶에 만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섬기는 사람이라야 세상이 살만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이웃을 존중하고 보살피려는 마음이 자라면 물질의 매력은 현저히 줄어들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조정하려는 욕망도 절로 줄어듭니다. 남을 살 맛 나게 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희망의 발전소를 간직한 사람입니다.

성도들의 사귐은 사랑과 이해와 자기 희생에 근거해야 합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실세였던 박지원씨가 녹내장으로 실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 값은 달게 받겠지만 하나 남은 눈마저 잃지 않게 해달라고 법원에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참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정에 지난날의 보좌관 한 사람만 달랑 참석했다지요. 권력무상이 실감납니다. 이전에 그와 인연을 맺으려고 줄을 섰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간 겁니까? 사마천은 "권세로 맺은 인연은 권세가 다하면 사귐이 소원해진다"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귐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매개로 해서 맺어집니다. 교회는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고, 연약한 것은 강하게 해주고, 무거운 짐은 함께 짊어지고 나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희망 발전소입니다. 희망이 방전돼 버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게 교회입니다.

● 소원의 풍성함에 이른 이의 삶
한 사람이 앞서간다고 교회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성원 모두가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 살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른 이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아니,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가한 삶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한가로움과 게으름은 다른 것입니다. 한가로움이 안식이라면 게으름은 태만입니다. 우리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살피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 '思' 자를 풀면 마음 밭이라는 뜻이 됩니다. 팍팍한 돌밭에서 돌을 캐내는 농부처럼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솟아나는 나태함과 교만 그리고 이기심, 탐욕을 마음 밭에서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섬김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의 눈물을 닦아주고, 막힌 곳을 뚫어주고, 지체된 것이 꽃을 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 닦음과 섬김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비우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의지는 무력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소망을 두시고, 그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도 주십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사람은 감사의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또한 오래 참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실망할 때도 있지만,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지진 않습니다. 넘어졌다가도 벌떡 일어나 다시금 앞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세상에는 우리 삶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유혹이 많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런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흘러가 버린 노래일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소처럼 묵묵히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하여 한 걸음씩 또박또박 걸어갑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안 됩니다. 자동차가 방전되면 다른 차의 도움을 받아야 하듯이, 우리는 서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뒤쳐지면 기다려주고, 비틀거리면 부축해주고, 넘어지면 일으켜주는 사랑의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든든합니다. 도와주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도움 받았다고 비굴해질 것도 없습니다. 도와주고 도움 받는 것은 자연스런 생명의 모습입니다. 믿음생활에 신명이 사라졌습니까? 그렇다면 아름다운 삶의 본이 되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십시오. 그분처럼 살려고 애써보십시오. 처음에는 어려워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애쓰다 보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어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서 스스로 희망 발전소가 되려고 애쓰며 살다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희망을 퍼 나르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멋진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우리 교우들 한 분 한 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공급하는 희망발전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5월 02일 14시 44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