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9. 뿌리와 날개
설교자 김기석
본문 룻1:14-17
설교일시 2004/5/9
오디오파일 s040509.mp3 [5568 KBytes]
목록

뿌리와 날개
룻1:14-17
(2004/5/9, 어버이주일)

초등학생들의 재미있는 답안지가 인터넷에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그것을 '엽기 답안'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저는 그게 엽기가 아니라 참신함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개미를 3등분하면?" 요구되는 대답은 '머리, 가슴, 배'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사태를 더 근본적으로 바라보기에 '죽는다'고 답합니다. 아이에게 있어서는 해부학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던 곤충이 죽는다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였던가 봅니다. "찐 달걀을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소금을 찍어 먹는다'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배운 대로 쓰기보다는 제 경험에 비추어 답을 씁니다. '가슴을 치며 먹는다'. 정말 재미있지요? "부모님들은 왜 우리를 사랑하는 걸까요?"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각자 마음으로 답해보세요. 아무래도 잘 설명이 안 되지요? 생물학적으로 답하겠습니까, 문화적으로 답하겠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아이도 난감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가 막힌 답 아닙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맞습니다. 어버이의 사랑에 이유가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쁜 짓을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탈옥수로 무명했던 신창원 씨가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답니다. 그는 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그 동기는 입신양명이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것입니다. 신창원 씨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만 그 어머니에게만큼은 소중한 자식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들도 아는 거지요. 어쩌면 성인이 된 이후 잊고 있던 어머니를 우리 가슴에 모시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버이주일인 오늘 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부관계를 보여주는 룻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배워보고 싶습니다.

● 룻기의 배경
룻기는 밀레의 '이삭줍기'처럼 목가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그 이야기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룻기가 기록된 배경은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입니다.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의 조처에 따라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조국산천은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전쟁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있고, 민심도 흉흉해져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성벽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낙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25:28)

사람들의 마음을 묶는 가장 든든한 끈은 종교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교 신앙을 새롭게 함을 통해 나라의 기초를 세우려 했습니다. 개혁의 열망에 불탄 그들이 맨 처음 취한 조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한다는 명목 하에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혼을 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겁니다. 룻기의 저자는 남편과 아내가 눈물로 헤어지고, 부모 가운데 한쪽이 자식들과 헤어지게 되는 반인륜적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모압 여인 룻을 등장시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은 누구보다도 사람다운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다윗의 증조할머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룻기는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관용의 정신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글인 것입니다. 대의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사이의 상호 이해와 존중과 배려임을 룻기는 보여줍니다.

● 고통을 연료로 삼아
먼저 우리는 나오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오랜 기근을 피해 고향인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왔습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과 함께였습니다. 물 설고 말 설은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서러운 데, 그의 의지였던 남편조차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나오미를 그래도 위로해 준 것은 두 아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그 지방의 아리따운 처자들과 맺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병약했던 그 두 아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오미는 아마 살맛을 다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를 반겨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를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했겠습니까?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모압은 나오미에게 시련의 땅, 불운의 땅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자기 고향 땅에 기근이 물러갔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나오미는 미련 없이 모압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하지만 두 며느리에게 생각이 미쳤을 때 나오미는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불러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해줍니다. 그리고 각자 재가하여 행복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그늘진 며느리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오미는 면목도 없고, 그 젊은 여인들의 아픔과 한이 눈에 밟혔던 겁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통해 나오미는 아픔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두 며느리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그래서 훨훨 날아가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며느리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려는 것입니다. 며느리들의 아픔까지도 다 부둥켜안으려는 나오미에게서 우리는 어두운 흙 속을 더듬는 뿌리의 고독을 봅니다. 세상에는 고통을 겪으면서 더 고집스러워지고 이악스러워지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 진실해지고 질박해지는 이들도 있다. 나오미는 자신의 고통을 연료로 삼아 타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진정한 사랑에 이르렀습니다.

● 자기 초월의 능력
오르바는 눈물로 작별하고 나오미 곁을 떠납니다. 오르바라는 이름의 뜻은 '반항적인', 혹은 '구름'입니다. 그는 한 줄기 구름이 되어 흘러갑니다. 하지만 누구도 오르바를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오르바는 상식 선에서 처신한 것입니다. 저는 오르바가 이후에 행복했기를 바랍니다. 이제 룻 차례입니다. 룻의 마음도 어쩌면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룻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홀로 흘린 눈물을 너무나 잘 알기에 룻은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일임을 왜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룻은 단호히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은 자기 부정에 이른 사람입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자기 초월의 능력에 있다 합니다. 룻은 욕망이 잡아끄는 대로 처신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남을 위한 애태움으로 빛을 발한답니다. 남을 향한 애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희생적 사랑을 통해 룻은 나오미의 삶에 화육합니다. 또한 자기 이름의 뜻을 실현해냅니다. '룻'은 '절친한 벗'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 세대의 노인들과 젊은이들의 관계가 이러하기를 꿈꿉니다. 젊은이들은 존재감 상실로 쓸쓸해하고, 질병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살고 계시는 노인 세대들을 진실로 공경하고, 노인 세대는 젊은 세대들이 겪고 있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아파할 때 세상은 이전보다 따뜻하게 변할 것입니다.

● 야만의 시대를 넘어
세계는 지금 이라크 포로들에게 가해진 학대와 모욕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벌거벗긴 채 파라미드처럼 겹겹이 쌓인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마성적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그것이 미국인의 본질과 진심이 아니라며, 일부 병사들의 일탈 행위로 몰고 가려 합니다. 도마뱀의 꼬리 자르기인가요? 하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힘이 한편에만 쏠려있는 곳에서는 그런 야만적인 폭력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병사들도 개인적으로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도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여운 자식일 것이고,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친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집단에 과잉 동일시함으로써 비도덕에 빠졌고, 무책임에 빠졌습니다. 사람 속에는 선의 씨앗도 있고, 악의 씨앗도 있습니다. 어느 쪽에 물을 주느냐는 우리들 각자가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힘을 가지고도 자기 충동을 제한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겪고 있는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더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한 순간만이라도 의식했다면 그들이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집단에 충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마땅함을 얻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공경도 사라진 문명이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나를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은 이웃의 슬픔에 대한 공감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뿌리가 되어 남에게 삶의 자양분을 공급하고, 다른 이들의 지친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려고 했던 나오미와 룻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사람의 본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땅의 어버이들이야말로 이런 사랑의 거장들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한계가 고작 가족들에게 국한되니 문제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 모두 어버이의 심정으로 이웃을 대하고, 피조물을 대함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라도 삶의 마땅함을 얻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5월 09일 14시 25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