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1.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31:18-22
설교일시 200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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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렘31:18-22
(2004/5/23, 웨슬리 회심기념주일)

웨슬리 회심 주일은 오늘 저는 생뚱스럽게도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을 건너는 아프리카 초원의 누를 떠올립니다. 누 무리는 강둑에 서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강을 바라봅니다. 그 강만 건너면 살 길이 열립니다. 어느 순간 누 한 마리가 땅을 박차고 힘차게 물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러자 다른 누들도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듭니다. 물론 악어에게 희생당하는 녀석들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누 무리들이 강 건너편의 단단한 땅을 딛고 서서는 가쁜 숨을 몰아 쉽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어쩌면 역사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강 언덕에 서서 망설이고만 있다면 악어의 공격은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겁니다. 강으로 뛰어드는 그 한 마리의 무모한 용기가 누 무리를 살리듯이, 역사는 변화의 강물에 뛰어든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웨슬리는 어쩌면 18세기의 영국이라는 강물에 힘있게 뛰어든 그 첫 번째 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8세기의 영국은 참 암담한 나라였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도시빈민의 삶을 살게 되었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과 질병과 범죄라는 악어 떼였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은 거칠어지고, 폭력과 파괴가 일상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사람들에게 잃어버렸던 하늘을 되돌려주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역사 변혁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 두 번의 회심
웨슬리의 첫 번째 회심은 1725년에 일어났습니다. 웨슬리는 그때 "어떤 경우에도 나는 흠 없이 거룩하게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시간을 정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에 정진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작심삼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재능이란 결국 지속에의 열정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지속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실망과 권태를 이기고 처음 뜻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웨슬리는 그런 의미에서 항심(恒心)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번째 회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균형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인간도 의로울 수 없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1738년 5월 24일은 그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달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좀 이상하지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좋은 날이라니요? 앙드레 말로는 살아오면서 가장 기쁜 날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겸양지사가 아닙니다. 자아로부터 해방됨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작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굳게 의지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됩니다.

● 내적인 변화, 역사 변화의 초석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웨슬리의 위대함이 아니라, 무력함에 대한 그의 깊은 자각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12:9b). 웨슬리는 이 일을 계기로 자기 지성과 의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지성과 의지가 쓸모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더욱 아름다운 내용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내적인 변화가 역사의 변화로 이어짐을 웨슬리의 삶은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움큼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부풀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들린 한 사람이 이루는 일은 위대합니다. 가난을 누이로 삼았던 12세기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삶이 그러하고,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을 자처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삶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믿는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연줄에 의지해서 인생을 풀어보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잘 압니다. 하지만 선뜻 그 뜻을 따를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속에 형성된 거짓된 자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꿈인 줄 알면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처럼 우리는 거짓 자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 멍에를 메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헛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이 그것입니다. 큰 시련을 겪고 나서야 백성들은 자기들의 허물을 인정합니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31:18b)

큰일을 겪고서야 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우리들이 병통인가 봅니다. 물론 큰일을 겪고도 깨달음은커녕 마음이 더욱 각박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다'고 고백합니다. 길들지 않는 송아지를 부룩송아지라고 합니다. 부룩송아지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갈 수 없습니다. 부룩송아지 같은 신자도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사마駟馬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사마는 말 넷이 끄는 수레를 뜻합니다. 보통은 한 두 마리가 끄는데 네 마리가 끄니까 대단한 위용이겠습니다. 그런데 사마의 바깥 쪽 좌우의 말을 참 (곁말 참)이라고 합니다. 안쪽의 두 말은 복服이라고 하는데, 이 복이란 말은 안쪽에서 멍에를 끼고 달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의 두 말은 멍에를 끼고 수레를 끄는 상머슴 말이고, 참의 두 말은 그야말로 덩달아 가는 곁마인 셈입니다. 처음부터 수레를 제대로 끌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服의 곁에 서서 그가 이끄는 대로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부룩송아지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멍에를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 노스탤지어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31:18c)

스스로 돌이키면 될 일이지 굳이 이끌어달랄 게 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 혹은 회심이라는 것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번번이 악을 행하는 자기에 대해 절망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탕자는 자기 발로 집으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를 잡아 끈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얼마 전 세계석학강좌가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렸습니다. 강사로 오신 정재식 박사님은 대학원 시절 저의 은사이기도 하십니다. 정박사님은 강연 중에 고국을 떠난 지 근 50년이 되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자기 정체성의 뿌리는 고향인 원주라고 말하다가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고향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향수를 뜻하는 노스탤지어(nostalgia)는 그리스어로 '돌아옴'을 뜻하는 'nostos'와 '고통'을 뜻하는 'algos'라는 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향수란 돌아가고 싶은 열망으로 말미암은 고통입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문득 '내가 너무 멀리 떠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실 때가 없나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만 있다면 이전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하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 모든 것을 맛있게 하라
한겨레신문은 요즘 <나눔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기획물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분이 있었습니다. 한림재활의학과 원장 서경배씨였는데 그는 8년 전부터 매달 수입의 20%를 각종 단체에 후원금으로 낸다고 합니다. 교회에 내는 십일조까지 합하면 30%를 조건 없이 내놓는 셈입니다. 그가 후원하는 곳은 빈곤지역 공부방, 지역 사회복지관, 가톨릭 사회복지관 등입니다. 그가 이런 나눔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은 형편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병원경영 실패로 많은 빚을 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에 가족의 생계조차 책임지기 어려웠습니다. 하루하루 삶이 버거웠던 때 그에게 일종의 '각성'이 왔습니다.

"그때까진 내가 잘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 재능은 남에게 베풀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와중에 누군가 나를 대가 없이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결심했지요. 기사회생하면 내가 도움 받은 것처럼 다른 이들과 나누며 살겠다고요."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났고, 자기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찾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발견했습니다. 삶이 밝아진 겁니다. 그후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결단을 장하게 여기심인지 하나님은 그에게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수술 없이 휜 다리를 교정하는 물리치료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약속대로 그는 번 돈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찾아온 깨달음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들었고, 그를 통해 많은 이들이 삶의 희망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소망은 이것입니다.

"그들도 커서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겠지요. 자신들이 받은 것처럼. 이게 제가 받는 보상입니다. 그걸 떠올리면 누구나 나눔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방황을 그쳐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지금은 '여자가 남자를 안을 때'입니다. 물론 예레미야 본문에 나온 '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남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웨슬리의 회심을 기념하는 것만으로 우리 영혼의 허기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회심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고, 그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얼싸안으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분을 얼싸안는 순간, 우리는 변혁의 누룩이 됩니다. 세상의 빛이 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어 세상은 더욱 선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곳으로 바뀝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말 한 마디를 오늘의 결론으로 삼겠습니다.

"모든 것을 맛있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된 당신의 본분이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5월 23일 14시 54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