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2. 기운 생동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전2:10-16
설교일시 200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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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 생동
고전2:10-16
(2004/5/30, 성령강림절)

● 새 삶의 싹 틔우기
큰 나무 사이에 떨어진 씨앗은 발아되지 못한 채 때를 기다립니다. 그것이 몇 백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큰 나무가 넘어지거나 베어지면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싹을 냅니다. 씨앗이 가능성이라면 그것이 발아하여 나무나 꽃이 되는 것은 현실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씨앗 속에는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사과 씨 한 알속에서 과수원을 보는 것이 믿음이랍니다.

우리들 속에는 위대한 영적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영혼 속에 보물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3:9)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씨가 세상의 여러 가지 염려와 근심과 욕망으로 가리워 있어서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을 쓸모로 평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보물을 캐기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욱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문화의 천박함의 뿌리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생의 가능성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싹을 틔운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주님의 분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광기가 자기들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숨었던 그들은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속에 죽을 수 없는 생명이 임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험도, 위협도 그들의 증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미워하여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 그들의 메시지는 소박했지만, 강력했습니다.

골방에 움츠렸던 이들이 광장에 나와 이렇게 담대히 예수를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속에 어떤 기운이 꽉 찼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호흡이고 생기입니다.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신, 에스겔 골짜기에 불어온 생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 언어의 변화
성령 받은 사람은 먼저 언어가 변화됩니다. 우리의 말살이, 곧 어법이나 어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더 이상 독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입장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골방을 박차고 나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방 지역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고 있던 순례자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자기들의 지방 말로 들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을 갈라놓았던 언어적인 장벽이 걷히는 순간입니다. 흔히 이것을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신비한 소통의 언어입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의심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건이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는 더 깊은 현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새와 짐승들에게도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가 설교를 할 때면 짐승들이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오고, 새들은 그의 어깨나 손에 내려앉았다지요? 인디언들은 벌들과 식물들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우리가 영적인 현실에 무지해서 그렇지, 세상의 모든 만물들은 이처럼 서로 통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眞情이 아닐까요? 진정은 인종과 피부색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을 통하게 만듭니다. 서로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공감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언어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통하게 해줍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말은 이웃의 아픔을 어루만져 낫게 하고, 무거운 짐을 덜어줍니다.

● 인생관의 변화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인생관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빌3:7)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정말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현대인들은 돈이나 명예나 힘을 마치 신앙의 대상인양 추구합니다. 물론 그것도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게 별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는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별 인기를 끌지 못합니다. 그것은 돈을 주고 구매할 수조차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투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만들고, 우정을 지키는 일……. 이 일이 돈 버는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게 사람 사는 도리입니다. 돈은 좋은 것이지만 사람을 망가뜨리는 흉기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돈이 개입되면 인간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의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됩니다. 그것 없이 살수는 없지만, 그것에 매여 살지는 않게 만듭니다. 우리 인생을 바쳐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생명의 거룩함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허영심에 이끌려 살지 않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일의 부질없음을 그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힘이 있습니다. 단조롭지 않은 세상을 단조롭게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변혁의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받들어 살아갑니다. 그는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초대에 감격합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셨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일에 동참할 수 있음에 감격하여 일합니다. 내 힘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일합니다. 성령은 '권능'입니다. 권능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는 뭔가를 하도록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것을 지향하도록 합니다. 그 길은 셋입니다.

●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
첫째, 성령은 우리에게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을 제공해줍니다. 산다는 것은 십자로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힘들과 충동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할 것인가?' 인생은 선택이라는 데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2:10)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2:15).

믿음의 사람은 옳고 그름을 자의대로, 기분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존재를 만드신 분에게 '아멘' 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쓰라림과 실패를 맛보면서도 끝끝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에게는 영생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둘째, 성령은 고통받는 자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우리 속에 일으켜 그들을 돌보도록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고통받는 이들을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그들 곁에 멈춰 서고 손을 내밀어 그들과 접촉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고, 헐벗은 사람은 입힙니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합니다. 월드비전의 긴급 구호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비야 씨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지구촌 어디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역시 월드비전 홍보대사인 탤런트 김혜자 씨도 결식아동돕기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냈는데, 그 책의 인세 전액인 삼천 만원을 용천역 참사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위해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모습은 평화롭고 자애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남을 복되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게 더 큰 유익이 됩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되고, 남들을 보살핌을 통해 성숙해지게 마련입니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우리 속의 욕망은 줄어들고, 거칠고 모난 성품은 부드러워집니다. 남을 돕는 것은 그렇기에 자기 자신을 돕는 길입니다.

셋째는 성령은 생명을 살리고 보살피는 일을 행하려 할 때 거룩한 능력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자각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고, 이끌고, 힘을 부여해주십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 일을 행하게 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라는 마귀는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답니다. 먼저는 자신이 행한 업적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이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 마귀는 아직 우리보다 못한 이들의 삶의 열매를 하찮게 여기도록 부추깁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다소라도 선한 일을 하며 산다면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힘만 듭니다.

●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성령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하늘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성령은 팍팍한 땅에 매여 살면서 지치고 상한 우리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 삶을 힘찬 삶, 기운 생동하는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기운'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히 차서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이랍니다. 그러니까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는 힘인 것이지요. 그 힘이 온전히 구현된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미에 성령을 '그리스도의 마음'(2:16)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사람의 삶은 단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섬김과 나눔과 돌봄을 통해 생명을 온전케 하는 그리스도의 마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지 않고, 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줍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선의 씨앗을 싹틔워줍니다. 그런데 성령은 누구에게 임합니까?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흐름을 끊고 하나님을 우러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성령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영이 우리를 세뇌시키는 시간에 비하면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은 턱없이 짧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삶이 곤고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을 하루에 두 차례 이상씩 꼭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을 늘리십시오. 우리가 변화되면 세상도 새로워집니다. 우리들 각자가 마가의 다락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희망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성령에 충만해져서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5월 30일 19시 20분 1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