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4. 밥과 하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6:48-51
설교일시 200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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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하늘
요6:48-51
(2004/6/13, 환경선교주일)

● 眞智 잡수셨습니까?
철학자 아리스토포스가 디오게네스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왕에게 아첨하면서 안락하게 사는 터였습니다. 마침 디오게네스가 콩꼬투리를 먹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포스는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왕에게 고분고분할 줄 알면 그 따위 형편없는 콩꼬투리나 먹고살지 않아도 되련만."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
"콩꼬투리를 먹고 살 줄 알면 왕에게 아첨 떨지 않아도 되련만."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위해 정신적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비단 아리스토포스만은 아닐 겁니다. '돈이 곧 자유'라는 자본주의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세상이니, 온갖 인습과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의 자족을 누렸던 디오게네스의 삶은 인기가 없을 게 뻔합니다. 지난 월요일에 우리 지방 교역자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점잖고 수줍음 많은 후배 목사가 제 옆에 앉아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농담 한마디를 던지더군요. "마지막 남은 음식에는 독이 들어 있다면서요?" 머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모두가 눈독을 들이니까요" 하고 제풀에 풀썩 웃었습니다. 모두 '허허' 하고 따라 웃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건 맞는 말입니다.

세상의 싸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정된 재화를 서로 차지하려고 눈독을 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까? 골고루 나누며 살면 싸움이 없겠는데, 구멍 뚫린 항아리 같은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폭식과 독식'의 세상에 평화는 없습니다. 영어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human-being인데 지금은 human-having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로워지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밥을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밥을 굶으면 나도 배고프지만, 다른 사람도 배고프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면 안 먹어도 배부른 것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남과 나누어 먹을 줄 알 때 우리가 먹는 밥은 '眞智'가 됩니다. 어른들을 보면서 "진지 잡수셨어요?" 하고 여쭙지 않습니까.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먹어야 진지가 됩니다. 오늘 아침 '진지' 잡숫고 오셨습니까? '참다운 지혜'의 삶은 형이상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비근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진리는 고상한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먹고, 자고, 입고, 싸고, 만나는 일을 배제한 진리 공부는 공염불입니다.

● 나는 밥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떡'보다는 '밥'이라고 번역하는 게 옳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 표현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렸을 겁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언어, 진실을 담은 언어라는 것은 뭔가 고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땅,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고상한 것과 속악한 것을 이원론적으로 갈라놓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멋있어 보이나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과 '밥'을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왕'이다 하면 멋있을 것 같은데, '나는 밥이다' 이러십니다. 날마다 먹는 것이 밥이니까 사람들은 별로 감동을 안 합니다. 시시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을 떠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자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가르치시기 위한 것입니다. 밥의 존재 이유는 먹히는 것입니다. 먹힘으로써 먹는 이의 기운을 북돋고 생명을 이어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밥, 다시 말해 생명을 주는 밥이 되고자 오셨습니다. 그런데 먹히는 것은 자기의 소멸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분의 뼈와 살을 나의 뼈와 살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일 겁니다. 그분이 아파하실 때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밥으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스스로 생명의 밥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저마다 '너는 내 밥'이라고 악을 쓰며 사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이 차리시는 생명의 밥상에 기쁘게 동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감히 쓰레기 같은 재료로 만두소를 만들 수도 없고, 돈벌이를 위해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잡는 짓을 할 수 없습니다.

●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여러분, 선지자 엘리사를 잘 아시지요? 한번은 엘리사가 길갈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생도들이 오랜 흉년 때문에 먹지 못해 부황이 들 정도였습니다. 안타깝게 여긴 그는 자기 사환을 시켜 솥을 걸어 국을 끓이게 합니다. 변변한 국거리가 있을 리가 없지요. 사환은 들에 나가 이리저리 헤매다가 들 외를 찾아냈습니다. 구황 식품으로 먹을 수 있겠다 싶었겠지요. 사환은 들 외를 숭숭 썰어 국그릇에 넣고 끓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퍼다가 선지자의 생도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첫 술을 뜨자마자 그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지독하게 썼던가 봅니다. 엘리사가 밀가루를 가져다가 솥에 넣었더니 먹을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왕하4:38-41)

오늘 우리들의 밥상을 돌아보십시오. 사망의 독이 넘칩니다. 농약과 제초제 화학 비료로 범벅이 된 주식과 부식, 색깔과 맛과 모양을 위해 화학조미료, 방부제, 감미료, 착색제, 산화방지제, 살균제를 듬뿍듬뿍 친 제조식품들…. 아이들이 좋아하는 패스트 푸드는 어떻습니까? 아동비만과 심장병·동맥경화 등 성인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비육우를 만들기 위해 화학 첨가제와 성장 촉진제를 섞은 배합 사료를 먹고 자란 육류에 대한 지나친 소비는 우리 건강을 해치게 마련입니다. 저는 요즘의 먹을거리의 심각함을 생각할 때마다 선지자의 생도들의 외침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사망의 독이 넘치는 우리 밥상을 생명의 밥상으로 바꿀 수 있는 이 시대의 '엘리사'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생명의 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그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시작해야 합니다. 유기농산물들은 비싼 게 사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말도 맞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의 밥상 차리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교회는 생명 밥상 차리는 일을 실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비용은 더 들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첫 걸음이기에 우리는 그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밥상 차리기는 생명 운동의 토대입니다.

● 두레 밥상
우리만 좋은 밥을 먹으면 안 됩니다.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우리 식탁에 다른 이들을 초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와서 좋은 것을 함께 나누자' 하는 마음에서 생명이 움터 나옵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마다 밥상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그 식탁에서 사회적 장벽들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하나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광야에서 사람들이 먹은 것은 기적적으로 늘어난 보리떡과 물고기라기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관심이 아닐까요? 사랑이 있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먹고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임을 일깨우시려는 것이었을 겁니다. 옛 사람은 '성인聖人 무기인無棄人이요 무기물無棄物이라' 했습니다. 하늘을 외경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버릴 사람도 없고, 버릴 물건도 없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 나라의 결식 아동은 20만 명 이상이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년 동안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조원이 된답니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입니까? 제대로 먹을 줄 모르면 제대로 살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듯 겸손하게 씹고 공손하게 삼킬 줄 알고, 남과 더불어 먹을 줄 알 때, 우리 문화는 건강해지기 시작할 겁니다.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겁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함입니다. 시인 정일근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입니다. 그 꽃밭에 앉는 사람 치고 귀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환영받는 밥상이기에 그 밥상은 두레밥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우리 밥상은 모난 밥상입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앉아 그 사랑 두레를 받아먹고 싶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머니'를 '하나님'으로 바꿔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의 밥상, 두레 밥상을 차려놓으시고,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두레에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나누어먹는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늘을 독차지 할 수 없는 것처럼 밥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 모두의 밥상이 두레 밥상으로 바뀌어서, 세상에 평화와 생명을 공급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6월 13일 14시 38분 5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