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6. 광야로 가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신8:1-4
설교일시 200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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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가자
신8:1-4
(2004/6/27)

● 광야로 부르시는 하나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광야의 모래바람과 절망감뿐이었습니다. 앞길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히브리인들은 신음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듣고 그들 곁에 오셨던 그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그들의 가슴에 여울여울 희망을 불어넣던 그 하나님은 왜 이렇게도 까맣게 타들어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시지 않는 것일까요? 훗날 이스라엘의 눈밝은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없이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 없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이는 없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나비 연구에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몇 년의 실험 끝에 한 고치에서 경탄할만한 나비를 부화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험실 직원들을 다 불러모아 그 창조물이 고치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날개가 빠져 나오고 그리고 왼쪽 날개의 대부분이 빠져 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직원들은 자축하기 위하여 샴페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왼쪽 날개 끝이 고치의 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나비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절망적으로 다른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애를 쓰는 동안 나비는 점점 기운이 빠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퍼덕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갔습니다. 끝내 과학자는 자신의 긴장을 참아내지 못하고 작은칼을 집어 그 구멍을 아주 조금 잘라냈습니다. 마지막 안간힘 끝에 나비는 실험실 탁자 위로 빠져 나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조용해져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비가 자유롭게 되기는 했지만 날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고투하는 과정은 피를 날개의 끝까지 보내 고치에서 나오는 동시에 새 생명을 즐기면서 마음껏 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법칙이었던 것입니다. 나비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 결국은 나비를 무력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야를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거짓된 자아와 마주서는 곳입니다. 그곳에 서면 가치의 우선 순위가 바뀌게 마련입니다.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며, 화려한 의복이 무슨 소용입니까? 한 모금의 물은 은총이고, 거칠 망정 먹을거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복입니다. 우리 삶이 제 자리를 잡으려면 타워 팰리스의 주민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광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병통을 꼽으라고 한다면 교만, 불신앙, 탐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차차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광야 학교는 이런 병통에서 치유받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교만함으로부터의 해방
첫째, 광야 학교는 우리 속에 있는 뿌리깊은 교만함을 치유해줍니다. 교만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으려는 병입니다. 자기의 영향력을 자꾸만 확대하면서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입니다. 지배란 다른 이들에게 자기 고유의 의사에 상관없이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라크에 군인들을 보내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은 허울좋은 명분일 뿐이고, 사실은 미국의 강요를 물리칠 수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하려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강제될 때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예속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비참합니다.

하지만 정작 불행한 이들은 교만한 자들입니다. 힘을 가진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뱀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선악과에 손을 대는 순간 그는 지옥에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실낙원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교만의 끝을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따른다."(잠11:2)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잠16:18)

우리 앞에 놓인 광야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연처럼 한없이 높아지려는 우리 마음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를 동일시할 때가 많습니다. 명함에 적힌 직분들, 자동차의 배기량, 아파트 평수…이런 자랑거리가 인생의 광야에 들어서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벌거벗은 존재로만 서는 것이지 우리의 소유나 이름을 가지고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광야가 허락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월이 우리에게 덧붙여준 것을 자기 자신인양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일들도 있음을 자각하고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 불신앙으로부터의 해방
둘째, 광야학교는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줍니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은 철저히 무기력했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할 수도, 마실 물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희망을 하나님께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섰습니다. 자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서게 됩니다.

필립 시먼스는 일리노이주의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 영문과 교수였고 주목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려 5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찻숟가락 하나로 생명을 덜어내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오히려 생의 충만함을 맛보았습니다. 시먼스는 어느 날 근심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 살배기 딸 애밀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아직은 너를 안아줄 수 있어."
"팔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네가 '나'를 안아주어야겠지. 네가 안아주기만 하면 난 괜찮을 거야."

우리가 완전히 무력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벼랑가로 내몰리는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쓰라린 고통과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저런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길입니다. 광야학교는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줍니다.

● 탐욕으로부터의 해방
셋째, 광야학교는 탐욕의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만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만나는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욕심껏 거두어들였다 해도 그것을 다음날까지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거둔 사람은 그것을 덜어내 덜 거둔 사람에게 나누어주었겠지요. 이게 사람답게 사는 방법일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老子도 말합니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보태는데,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서 모자라는 것을 덜어 남는 데 보탠답니다(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77장).

저는 세상에 폭력이 그치지 않는 것은 남의 몫까지 독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두 배의 몫을 누리면 분명히 굶주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러면 굶주린 사람은 제 몫을 차지한 이들을 증오하게 될 것입니다. 김선일 씨의 죽음은 바로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정부의 무능을 준엄하게 물어야 합니다. 칼날 아래 서있는 그를 보면서도 이라크 파병은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그렇게도 재빨리 선언해버리는 대통령의 모습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정부 당국자들에 대해 질책하는 데 그치고 만다면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테러리스트들을 키운 것이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입니다. 나는 천사처럼 살수도 있고, 악마처럼 살수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좋은 점을 발전시켜주고, 나쁜 점은 자라나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가슴속에 증오를 심어 악마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들 속에 있는 악마를 키우고, 깨운 것이 누구입니까? 김선일 씨를 올바르게 추모하는 방법은 우리의 탐욕을 회개하고, 배고픈 상태로 잠드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어버리고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돈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그 때문에 가난을 대물림해야 하는 일들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세상을 이루자고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강자를 중심으로 세워진 사회체제가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체제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로 가 우리 몸과 마음에 깃든 교만을 털어 내야 합니다.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탐욕의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광야를 마다하면, 광야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삶을 재점검해야 합니다. 이제 덜 가지고, 더 많이 나누며 사십시오. 그것이 세상에 평화를 심는 일입니다. 바울은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라'(롬12:16)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이 새로워지는 길입니다. 그들과 교류하면 자기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삶이 변하게 마련입니다. 남을 위해 내 살림의 규모를 줄일 때, 하나님의 은총은 더욱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음 쓰며 사는 것은 기쁨과 신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화의 일꾼으로 우리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이 복된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6월 27일 15시 16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