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7. 가장 큰 유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왕하2:7-14
설교일시 2004/7/4
오디오파일 s040704.mp3 [649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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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유산
왕하2:7-14
(2004/7/4)

● 니토크리스의 비문
만약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 밖에 더 살 수 없고, 우리가 남겨놓고 갈 수 있는 것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남겨두고 떠나시렵니까? 금고 깊숙한 곳에 간직해두었던 땅 문서인가요? 물방울 다이아몬드 혹은 큰 맘 먹고 구입한 밍크코트? 그런 게 없는 이들도 일단은 유형적인 무엇인가를 떠올리려고 애쓸 겁니다. 음식점을 하는 이들은 비법을 물려주나요? 연구자들은 비밀리에 진행해온 연구 과정과 결과를 남겨두고 싶어하겠네요. 그런데 우리가 물려줄 게 그런 것 밖에 없을까요?

바벨론의 왕 가운데 니토크리스라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때는 메디아의 강대한 세력이 바벨론을 압박하던 시기였는데, 니토크리스는 아주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거대한 운하를 파서 유프라테스 강을 굴절되어 흐르게 함으로써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고, 강의 양안에 높은 제방을 쌓음으로써 도시의 방비를 견고히 했습니다. 여왕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문 위에 자신의 묘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비문에는 이런 문구를 새겨 놓게 하였습니다.

금후 바벨론의 왕으로서 돈이 궁한 자는 이 묘를 열고 마음대로 돈을 취하라. 그러나 돈이 궁하지 않을 때는 함부로 열지 마라. 재앙이 있으리라.

그 문은 오랫동안 사용할 수 없었는데, 누구도 시체 밑을 통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묘도 오랫동안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도 나오는 다리우스 왕은 문도 다시 사용할 겸, 보물도 취할 겸 무덤을 열도록 지시했습니다. 묘를 열자 그 속에 보물은 없고 시체와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만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네가 탐욕스럽지 않고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돈벌기를 바라지 않는 자라면, 죽은 자의 관을 열지는 않았으리라.(『헤로도토스의 역사』상권, 범우사, 138-9쪽)

참 심술궂은 여왕이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유인의 긍지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니토크리스는 어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당신의 영감을 갑절이나
불교의 스님들은 자기의 정신적 후계자에게 의발(衣鉢)을 물려줍니다. 낡은 옷 한 벌, 밥그릇 하나, 그게 전부입니다. 물론 재산권 다툼을 하는 현실의 불교는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발을 물려주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입던 낡은 옷 한 벌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다고 하면, "에이, 장난하세요?" 하면서 대들 겁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의발의 전수는 정신의 계승을 의미하는 아주 소중한 상징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영화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군인들에게 붙잡혀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소란 속에서 요한의 겉옷이 땅바닥에 떨어지는데, 먼 곳에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예수님이 그 옷을 집어들고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십니다. 함께 영화를 본 청년들에게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더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이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같이 웃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라는 마가복음 1장 14절의 말씀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겁니다. 요한의 길과 예수의 길은 다르지만, 지향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임을 그 짧은 영상은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지요.

옷을 집어드는 이야기는 오늘의 본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엘리야는 자신의 생도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등졌던 아합과 이세벨에 맞서 싸우느라 지쳤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내라시면서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7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의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쉽게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믿는 이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라 하는 이들은 어쩌면 그 7천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랜 싸움에 지친 엘리야의 가슴에 다시 한번 용기의 불꽃을 지펴주었던 소중한 동지들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 이들을 만나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산지인 길갈을 떠나면서 엘리사에게 그곳에 남아있으라고 하지만 엘리사는 스승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없습니다. 엘리사는 스승이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가로…. 요단강을 앞에 두고 엘리야는 겉옷을 말아서 물을 칩니다. 그러자 물이 갈라지고 두 사람은 걸어서 강을 건넙니다. 강을 건넌 후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제자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머지 않아 떠나실 스승에게 그가 구하는 것은 영적인 깊이입니다. 엘리야를 휘몰아갔던 하나님의 영을 자신에게도 허락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갑절이나. 이런 욕심이라면 부려볼 만하지 않습니까? 어떤 유형적인 유산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의 골수를 달라는 것입니다. 스승은 그런 제자가 싫지 않았을 것입니다. 싫다니요, 오히려 고맙지요. 하지만 그에게 영감을 주고 안 주고는 엘리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하늘로 올리우는 것을 보게 되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더니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엘리사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외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이것은 안타까움의 탄식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살았던 한 위대한 인간에 대한 송가입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위대한 성자도 예언자도 아닙니다. 아버지입니다. 육신을 낳아 준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의 정신을 낳아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던 야훼 신앙을 일으켜 세워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스라엘을 지킨 자, 곧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인 것입니다. 정신이 무너지면 그 나라는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렵더라도 민족적인 자존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국방체계 뿐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정신이 지킵니다. 인도인들은 비폭력과 불살생(ahimsa)의 정신으로 영국에 맞서 싸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s Karamchand Gandhi, 1869∼1948)에게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혼이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정신, 깨어있는 정신이 있다면 그 사회는, 그 나라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 위대한 정신의 계승자
엘리사는 자기 옷을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옷을 집어듭니다. 이제부터 그는 개인인 엘리사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정신의 계승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외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그러자 물이 갈라졌고 엘리사는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귀한 일은 스승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스승은 '큰 정신'을 의미합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정신적으로 올곧은 삶을 살면서 사람들의 사표 구실을 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다 큰 정신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스승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아름다워집니다. 살아가면서 큰 정신을 만날 기회가 생기거든 열 일을 제쳐두고라도 그와 만나십시오. 그게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라는 큰 스승 곁에 그렇게도 오래 머물렀는데, 우리 정신은 여전히 의식주의 주변만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은 애초부터 스승으로부터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영감이 내게 갑절이나 있기를 원합니다" 엘리사의 그 간절함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 달라질 겁니다.

음식이 좀 거칠면 어떻습니까? 옷이 좀 남루하면 어떻습니까? 진정한 힘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옵니다. 우리는 공직자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그 사람이 제 아무리 유능해도 도덕성을 잃으면 그는 지탄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도덕성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합니다.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좋은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배움의 기회? 재산?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른 정신/큰 정신과 결합되지 않을 때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됩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대의 유산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서라도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삽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회하며 사는 사람은 누추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다리우스 왕처럼 죽은 자의 무덤을 뒤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로부터 여호수아로, 엘리야로부터 엘리사로 이어지는 큰 정신의 계승은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어 받아야 하고, 그리고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남겨줄 꿈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위대한 신앙의 계승자가 되어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정신을 세상 도처에서 펼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7월 04일 15시 15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