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8. 그리스도인의 인식표
설교자 김기석
본문 갈6:14-18
설교일시 20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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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인식표
갈6:14-18
(2004/7/11)

●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군인들 목에 걸려 있는 게 뭔지 다 아시지요? 인식표라는 것입니다. 군번과 이름이 적혀있는 것인데,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그 까닭은 만일 전투 중에 사망하면 인식표 하나는 그의 입에 물려놓고, 하나는 가져가기 위해서랍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시신을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요. 군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인식표는 뭘까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서 '아, 저 사람 기독교인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표식 말입니다. 십자가 목걸이, 성경책, 현관에 붙어있는 교회패, 식사 기도, 차에 붙이고 다니는 물고기 상징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고, 차에 물고기 마크를 붙이고 다니는 뜻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방종한 행동을 삼가기 위한 자기 검열장치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을 일종의 부적처럼 사용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벽사(벽邪, 사귀를 물리침)에는 십자가 만한 게 없다면서요? 옛날 영화를 보면 드라큘라를 향해 십자가를 내밀면 꼼짝 못하지 않아요? 물고기 마크를 붙인 채 곡예운전을 하시는 분들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온갖 반칙을 저지르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참 민망합니다.

십자가는 상징도 부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고 결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바울의 이 고백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희생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요. 예수님은 흠 없는 희생양이셨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가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은 삶이었습니다. 세상에 계신 동안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켰기에, 주님은 흠 없는 희생양의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또한 폭력과 미움과 분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한없이 큰사랑으로 얼싸안아 버리셨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고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엾게 여기셨을 따름입니다. 이로써 주님은 우리가 죽음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응대하고,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찬양만 하고 있으면 되나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주님만 지시는 게 아니라, 우리도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짐이 아닙니다. 자유입니다. 바울은 그 십자가를 딱 잡았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공부하고 기도하고 추구해왔던 것이 십자가 속에 다 녹아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십자가에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다 못박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그를 달뜨게도 만들고 힘겹게도 만들던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게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드라큘라가 십자가 앞에서 달아난다는 것을 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보고 싶습니다. 사탄이 우리 속에 깃드는 통로는 '욕심'과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물욕이든 영적인 욕심이든 과도한 것을 원하는 것은 사탄을 초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우리 속에 어둠이 있을 때만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십자가를 굳게 붙잡는다는 것은 자기 욕망에 이끌리지 않고 남을 복되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이 앞에서 어둠의 세력은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에게 사탄은 범접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꼭 붙잡고 사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는 이기적인 척도에 따라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아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보고, 사랑으로 덮어가며 평화를 이루어냅니다. 정진규 시인의 <돋보기 안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돋보기 안경을 새로 맞춰 썼더니 당신의 얼굴 날내나게 화안하다

보이던 부처님이 어디 가셨나 괜한 짓 했다

돋보기를 쓰고 남의 허물을 찾지 마십시오. 너그러움과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서로를 보십시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과 만나는 이들에게 약속되는 생의 열매는 '평강'과 '긍휼'입니다. 이때의 평강은 별일이 없는 데서 비롯된 평강이 아니라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근원적인 기쁨에서 비롯된 역동적 평강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삶이 힘겨울 때면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생각하십시오.

● 예수의 흔적
십자가를 붙잡은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육체의 할례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할례 받고 안 받고'가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할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유대인이라는 외적인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롬2:28) 했고, 예레미야는 "마음 가죽을 베라"(렘4:4) 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하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결정타를 날립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17).

여기서 예수의 흔적(ta stigmata tou Iesou)이란 '스티그마'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스티그마는 불에 달군 쇠로 소나 말의 엉덩이에 찍어 그 주인을 나타내는 표식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말은 물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과정에서 바울 사도가 겪은 고난의 흔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폭동에 휘말리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배척 당하고…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고후11:18-33 참조). 立身揚名을 노려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가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은 것은 예수의 생명, 시들 수 없고, 더럽혀질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가져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의 몸에 난 고난의 흔적들은 그가 누구에게 소속된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지를 확연히 드러내줍니다.

● 우리는 무엇을 내보이려는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주님은 도마에게 당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이십니다. 그 상처는 죄악의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하늘로 이끄시기 위해 당하신 고난의 흔적입니다. 그 상처 앞에서 도마의 마음은 녹고 맙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진실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몸에 새겨진 주름살을 보며 감동합니다. 그 흰머리를 보며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내 보이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영광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유혈로 인해 죽을병이 든 이 세상에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비굴해지지 않는 영혼의 힘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후 우리가 죽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가 주님께 내보일 상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속한 존재임을 드러낼 '스티그마'는 있습니까? 그 스티그마야말로 우리가 주님의 아들 딸임을 증거하는 인식표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고난의 흔적이야말로 부활의 날에 빛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도 확고히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7월 11일 15시 04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