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9. 아멘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1:17-22
설교일시 200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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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고후1:17-20
(2004/7/18)

● 이해와 오해 사이
누군가로부터 이해받음에 기뻐하고, 오해 때문에 맘 상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나 비범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우리 삶은 그래서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흔들리는 고해입니다. 예수님도 아둔한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막9:19) 하고 탄식하셨고,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당하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눅4:24)고 하셨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가까이 있는 이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 못난 인간의 버릇인가 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급히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파벌다툼과 비윤리적 행위으로 인해 신앙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울은 교인들로부터 아주 충격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니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영적인 카리스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한 체험을 했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신비로 유혹하면 복음의 본질은 사라지고 신비에 대한 열광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순한 동기를 가진 교사들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들이 경험한 황홀체험을 자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자랑하면서 교인들을 유혹했습니다. 한번 마음이 비뚤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초라한 행색과 어눌한 말솜씨도 시빗거리로 삼았습니다. 그의 심정은 어쩌면 애써 키운 자식에게 어미 대접을 못 받는 어머니의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 온 몸이 귀가 되어 좋은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고린도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약속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위인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본래 바울은 유대에 있는 가난한 기독교인들을 위한 의연금 모금을 위해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고린도에 들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고린도에 들를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고전16:7)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교인들로부터 받은 모욕과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라, 바울은 그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은 약속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고후1:12)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가 '예' 하면 그건 '아니오'이고, '아니오' 하면 '예'라고 해석하면 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정말 이 정도면 막 가자는 것이지요?

● '아멘'이 되신 주님
바울은 이 대목에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자기는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은 자칫 오해를 불식시키기보다 키우는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지만, 바울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입장을 변증합니다. 아니, 그가 지키려는 것은 자기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곡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람인지라 사람들의 반응이 그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정대로 처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본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삶의 뿌리인 예수의 성실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19b-20)

예수님은 경우에 따라 자기 입장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3:14)라고 부릅니다. 이 말보다 예수의 존재를 잘 드러낸 말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내 뜻'을 앞세운 것이 첫 번째 아담의 길이었다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의 길은 하나님의 명을 이루기 위해 '내 뜻'을 버린 길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십자가를 지심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명 앞에 자기 뜻을 굴복시키셨기에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기에 공수표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입니다. 초본 식물인 대나무의 큰 키는 중간에 있는 마디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일념으로 곧게 자라려면 생활의 중간에 어떤 마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 마디가 바로 '아멘'입니다.

오늘에 와서 '아멘'이라는 말이 많이 오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 데나, 아무 때나 '아멘'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기 위해서는 전인격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때로 그것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고통을 감수하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이익을 포기할 때, 의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을 받을 때, 다른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할 때 우리 영혼에는 마디 하나가 생겨나고, 우리 정신의 키는 자라게 마련입니다. 나를 중심에 놓고 처신하기보다 다른 이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의 행복을 위해 마음 쓸 때 우리 영혼에서는 맑은 소리가 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침내 넘어야 할 '문지방'입니다. 그것을 넘고 안 넘고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 문지방을 넘지 못해서 우리 삶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합니다.

● 우리 삶이 아멘이 되려면?
그러면 우리 삶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 확고한 믿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확신이 있어야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하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당신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 기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이 사귀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난감한 처지에 빠질 때마다 인간적인 방도를 강구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아무리 분주해도 경전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에 질서와 평화와 평정을 가져오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엎드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힘은 엎드림에서 나옵니다.

▶ 말씀 묵상
그리고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길로 삼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 앞에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는 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일 겁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절대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감정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것은 뜬구름처럼 속절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다가는 낭패를 면할 수 없습니다. '狼狽'는 제 꼬리를 밟고 넘어지는 짐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조율된 경험과 지식이라야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 마음에 일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새겨질 때 사라집니다. 곰팡이는 햇빛을 받을 때 없어집니다. 말씀의 불을 켜고 자신을 살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믿는 이들이 밥먹듯 해야 할 일입니다.

▶ 소박한 생활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소박한 생활을 들고 싶습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은 우리 마음을 물크러지게 만듭니다. 아테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그리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사람은 페리클레스라는 참주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아름다운 고대 건축물들이 그의 시대에 축성되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리스를 지중해의 중심으로 세운 사람인데, 전몰장병들을 위한 국장(國葬)에서 그가 한 연설은 지금도 연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은 자유민으로서의 그리스인들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상권, 범우사, 175쪽)

그들은 물질적인 풍부함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정신적 자유를 소중히 여겼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긍지로 삼았습니다. 그렇기에 유약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인 戰士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전사의 삶은 소박해야 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 앞에서 등을 돌렸던 젊은이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부터라도 우리 인생에 '아멘'이라는 마디를 만들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극복함을 통해 성장합니다. 운동 선수들이 자기들의 체력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땀흘리는 것처럼 우리는 영혼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아담의 길에서 벗어나 예수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 하면서도 자기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아멘' 하여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7월 18일 15시 19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