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0. 빛과 그림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3:16-21
설교일시 200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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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요3:16-21

● 요순(堯舜) 그리고 걸주(桀紂)
세상이 성가대가 들려주는 찬양처럼 조화롭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 다른 소리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듯이, 서로가 차이를 인정하면서 때로는 받쳐주고 때로는 앞에서 이끌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한결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희대의 살인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사람들마다 그런 탄식을 쏟아냅니다. 그는 악마인가요? 그렇기라도 했더라면 마음껏 그를 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한때는 의리파 사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그 지경이 된단 말입니까?

선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를 옛날 임금에 견준다면 어떤 임금에 견줄 만하오?"
정이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김성일은 달랐다.
"요 임금, 순 임금도 될 수 있고 걸 임금(夏), 주 임금(殷)도 될 수 있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요순과 걸주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전하의 자질이 고명하시므로 요임금, 순임금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인인 듯 여겨서 신하들이 간하는 것을 막는 병통이 있사옵니다. 간하는 것을 막고 스스로 성인인 듯 여기는 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낯빛이 변하여 몸을 비틀대며 용상에 기댔다. 좌우의 신하들이 벌벌 떨었는데, 유성룡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둘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요순에 비교한 말은 임금님을 인도하려는 것이며, 걸주에 비교한 것은 경계하려는 뜻이 있사옵니다."
그제야 임금은 낯빛이 풀어져서 술을 내리고 모임을 끝냈다 한다.
―김시양, 『자해필담』중에서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김성일의 용기가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자 마음에 분이 가득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경계하고 계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

죄악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선조 임금도 걸왕 주왕과 같은 폭군이 될 수 있고, 사소한 일에도 상처받고, 때로는 분노에 사로잡히는 우리들도 유영철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참 슬픈 존재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 세상도 어둡긴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창6:5-6)을 조금은 알 듯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 하나님의 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하나님 정말이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숨막히는 세상을 사랑하신다구요?" 하나님은 그렇다고 하십니다.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었던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몸으로 증거하는 분이십니다.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소외된 사람, 제 잇속 차리기에 재빠른 사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랑 등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사랑 밖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돈키호테처럼 저돌적인 사람, 햄릿처럼 신중한 사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주님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사람들을 뽑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셨을 뿐입니다. 아무리 높아도 다 덮어주고 아무리 하찮아도 다 감싸주는 것이 하늘이라지요?

죄에 얽히고, 욕망에 얽매인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저주가 아니라 사랑임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리운 죄의 먹장구름을 걷어내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일깨우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죄와 정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행해 내미신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 손을 붙잡고 안 붙잡고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분의 손을 굳게 잡으면 우리는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를 향해 내미신 주님의 손을 잡지 않으면 우리는 죄와 욕망의 늪 가운데 가라앉고 말 겁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당신 모시기를 싫어하는 이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롬1:28). 그의 행실이 곧 그의 심판인 것입니다.

손을 붙잡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체적인 응답 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생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유인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사람들의 삶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어둠을 더 사랑하지요? 자기의 어두운 행실이 폭로될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우리는 죄지은 사람의 목소리가 크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도덕적 정당성을 잃은 사람들이 오히려 남의 작은 허물에도 크게 반응합니다. 어둠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 마음의 옷깃을 바로하고
18세기의 문장가인 이덕무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깊은 밤중인데 이웃집에선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연신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건너옵니다. 성근 창 틈으로는 눈 가루가 펄럭이며 들어와 책상 위로 떨어집니다. 왁자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드는데, 문득 벽에 웬 수척한 사내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무거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엄숙하게 옷깃을 바로하고 똑바로 앉아서 자세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붙박힌 듯 집의 들보를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옛사람의 고결한 행실과 바른 절개가 역력히 떠올랐습니다. 그는 혼자 결연히 말했습니다. "명절(名節, 올바른 이름과 곧은 절개)을 세울 수만 있다면 비록 바람 서리가 휘몰아치고 거센 파도에 휩쓸려 죽게 된다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또 인간 세상의 쌀과 소금 따위 자질구레하게 사람을 얽어매는 것들은 훌훌 벗어던져 깨끗이 마음에 두지 않겠다." 경전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보니 마침내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정민, 『미쳐야 미친다』중에서)

누구라도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잘못과 허물을 보고 마음의 옷깃을 단정히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구슬픈 생각에 떠밀려가던 이덕무의 마음이 평안해진 것은 자기 연민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거친 세상을 살면서 혹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 사랑하지는 않는다 해도, 어둠을 더 익숙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빛 앞에 설수록 우리 그림자가 더 짙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를 보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우리는 가릴 것이 많습니다. 남에게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은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빛 앞으로 가져갈 때 우리는 해방될 것입니다. 거짓은 거짓을 낳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부릅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탕자를 사랑으로 맞아주셨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빛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자기의 지체를 죄에게 불의의 병기로 바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을 주님께 봉헌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전히 죄의 소원은 우리를 방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한번 두 번 죄의 소원에 응답하지 않으면, 죄의 힘은 현저히 약화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서 시작된 어둠이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움과 질투와 교만과 다툼이 어둠을 빚는 공장입니다. 이제 어둠의 매혹을 떨쳐버리고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한 걸음씩 걷다보면 우리는 어느 결에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림자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드리울 수밖에 없는 그림자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사랑과 신뢰의 끈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를 결합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어주신 희망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탄식만 하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될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7월 25일 17시 32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