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2. 뿌리와 결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잠언12:10-17
설교일시 200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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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결실
잠12:10-17
(2004/8/8)

어떤 아버지가 밥상 앞에서 아들이 밥알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쌀 한 톨을 거두기 위해 농부들은 일년 동안 땀 흘려야 한단다."
그러자 아들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백 톨을 거두자면 백년이 걸리겠네."
이야기 속의 아들처럼 현대인들은 어른들의 훈계쯤은 코웃음으로 흘려버리고 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말도 도무지 귀담아 듣지를 않습니다. 다들 자기 생각에 골똘해서, 또 자기 삶의 습성에 매여서 스스로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비슷한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말씀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때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말씀을 거울로 삼아 자기를 비추어보고, 그 말씀에 따라 자기 삶을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김재흥 목사님이 그랬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You are right!' 하시면 의인이라고요. 간명하지만 옳은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의인과 악인의 특성을 간략하게 대조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생명에 대한 경외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10)

표준새번역은 이 대목을 "의인은 집짐승의 생명도 돌보아 주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한 마디로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돌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합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한다면, 온 세상에 있는 뭇 생명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잘 돌보는 사람을 보고 '옳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날마다 생명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모든 생명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옛 사람들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벨 때도 죄스러워 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면서도 그 생명과 하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먹는다는 행위는 하늘을 모시는 행위(以天食天)였습니다. 하지만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방식이 반생명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가축을 사육하고 도축하는 방식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라는 잠언의 경고가 우리 시대처럼 들어맞는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여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가리켜 하안거(夏安居)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하안거의 유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석가모니 당시 인도에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출가 수행자가 많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가 되면 땅 속에서 기어나오는 작은 동물들을 밟지 않기 위해 하안거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른 생명에 대해서 잔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자기 마음속의 날카로운 것들을 녹여낸 사람들이 아닐까요? 광주의 시인인 김준태는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어린 생명들을 짓눌러 죽일까봐서 날마다 손톱을 깎으며 더욱 사람이 되자고 마음속으로 외친다고 말합니다. <감꽃>이라는 시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기가 막힌 요약입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전쟁과 근대화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풍요로움이지만, 빼앗아간 것은 순박하고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소중한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뿌리로 열매 맺음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12)

악인은 자기가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두려고 합니다. 그의 관심은 당장의 이익입니다. '이익'이야말로 그의 삶을 이끌고 가는 열쇠어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뿌리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습니다. 악인의 관심이 결실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의인은 뿌리의 견실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뿌리'는 '本'이고 '열매'는 '末'이다. 글자의 자형을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본'이라는 글자는 나무 木의 아래에 가로획이 그어져 있어 뿌리를 가리킵니다. '말'이라는 글자는 나무 木의 위에 가로획이 길게 그어져 형성된 단어로 가지를 가리킵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처럼 本이 末을 살리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뿌리가 가지를 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지, 가지나 열매가 뿌리를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나무는 살 수 없습니다. 충북 보은에 있는 천연기념물 104호인 白松이 고사했다지요? 뿌리가 썩어서 생육이 멈추었기 때문이랍니다.

잘 산다는 것은 본을 세워 말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익을 따라 살다보면 정신은 물크러질 수밖에 없다. 뿌리를 견실히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땅 속에 있는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허영심이 많은 이들은 겉꾸미는 일에 온통 마음을 쏟느라 자기 뿌리가 병들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의를 추구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뿌리로 말미암아 생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병든 뿌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삶에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쳐냄으로써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야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 多言數窮
"악인은 입술의 허물을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13)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습니다. 남의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달고, 한 마디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덫이 되어 발설자를 포박하는 일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말이라는 게 서로 통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말 때문에 사람 사이가 막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악인은 말을 절제하지 못합니다. 의인은 말을 절제합니다. 옛 글에도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라(도덕경 5장)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그 中을 지킴만 같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말없이 과묵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편벽된 마음이나 사사로운 뜻을 앞세우거나, 어떤 의도를 밑바닥에 깔고서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말이 많은 것은 대개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자연스러운 것을 굳이 설명하려니 말이 자연 많아지고, 그럴수록 복잡하게 엉켜들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을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입니다. 줏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한 점 흔들림 없이 자기 편견을 진리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집니다. 사람은 서있는 자리에 따라서 사물이나 사태를 전혀 다르게 보게 됩니다. 운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행자가 얄밉고, 보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운전자가 무례합니다.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을 전제로 하지 않은 진정한 이해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易地思之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말을 절제하는 것은 진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그는 또 하나님의 뜻을 향해 마음의 안테나를 높게 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그는 재난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 모욕을 참음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16)

화는 불(火)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인가요? 그런데 화는 또한 화근(禍根), 즉 재앙의 뿌리입니다. 화 잘 내는 사람은 남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을 가합니다. 그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자취를 감추고, 불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자기 속에 여백이 없는 사람일수록 화를 잘 냅니다. 티벳의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라다크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모욕은 '화 잘 내는 사람'이라는 말이랍니다. 살다보면 사람들 사이에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의견이 갈리면 논쟁을 하지 않고 의논을 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관용이 낯선 외지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어쨌든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해요"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이웃을 함께 살아가야 할 파트너로 생각하는 사람은 분노를 당장에 표현하지 않습니다.

모욕을 참아내는 사람은 비굴해 보일 수도 있고, 무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무력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하기 때문에 남과 다투거나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화 잘 내는 사람, 작은 모욕도 참지 못하고 발끈하는 사람은 겸손을 배우지 못합니다. 정신이 자랄 틈이 없습니다. 뿌리로 사는 사람은 어떠한 모욕도 뿌리를 키우는 거름으로 삼을 줄 압니다.

나는 우리가 근대 이후의 삶을 살면서 잃어버린 생태학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도 생각합니다. 일주일에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자연 가운데로 들어가고, 하루 중 다만 몇 분만이라도 나무와 풀 앞에 멈추어 설 수 있다면 우리 삶의 질은 달라질 것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하는 사람은 '말'에 치중하는 삶에서 벗어나 '본'을 바로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된 평화가 뿌리를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8월 08일 16시 55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