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3. 형님의 얼굴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33:1-11
설교일시 200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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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얼굴
창33:1-11
(2004/8/15)

● 얼굴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얼굴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창이라는 뜻일 겁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데도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얼굴도 있습니다. 추한 듯 싶으면서도 형언하기 어려운 빛이 서려 있는 얼굴도 있습니다. 성형수술로 모양은 바꿀 수 있지만, 얼굴이 드러내는 깊이까지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참 고운 얼굴 하나 없다'고 탄식합니다. 수심에 찬 얼굴, 병색이 완연한 얼굴, 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 얼굴에 독살이 박힌 얼굴, 욕심에 잔주름 잡힌 얼굴…. 함선생님이 보고 싶은 얼굴은 예쁜 얼굴이 아닙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함석헌 선생님은 예수님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본 적은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존재가 곧 그의 얼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기도 한 얼굴, 분노로 창백해지기도 하고, 고통으로 일그러지기도 한 얼굴이지만 그 얼굴은 고스란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남김없이 드러낸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얼굴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사람들은 아기의 얼굴에서 아빠나 엄마의 모습을 찾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아빠를 닮았다고도 하고, 엄마를 닮아 예쁘다고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부모는 뿌듯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얼굴은 과연 누구를 닮았나요? 가끔 거울을 보다가 퀭한 눈을 한 어떤 사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어 놀랄 때가 있습니다. 권태롭고 진부하고 지루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속보이는 말처럼도 들리지만,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형제간의 반목의 역사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동이 형제입니다. 그들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싸움질을 해댔습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그 이름을 에서라고 했고, 나중에 나온 아이는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우리말에도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다지 좋은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두 아이는 한 배에서 났으면서도 기질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에서는 호방한 성품인데다가, 성격상 복잡하게 얽힌 데가 없는 자연인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동생인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넘겨달라고 말했을 때에도 야곱의 계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동생 야곱이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동생을 죽이리라고 다짐하지만 그 분을 오래 품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야곱은 정말 비열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직분을 가로챈 것도 문제지만,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몸에 털을 붙이고 음성까지 변조하면서 에서의 흉내를 내는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요즘 말로 야곱은 개인기를 부린 것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야곱을 자기들의 선조로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호방하고 털털한 자연인 에서가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인들의 탁월한 현실인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멋스러움이 아닙니다.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정의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래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는 에서는 그들의 삶의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생의 가능성을 가볍게 보는 에서의 휴머니즘보다는, 오히려 경솔하게 다루어진 남의 생득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야곱의 비정함에 손을 들어줍니다. 삶을 대하는 야곱의 태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물론 히브리인들은 야곱의 행동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의 명분을 탈취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의 삶을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평안이 아니라 고생이었습니다. 그는 형의 분노를 피하여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종살이와 같은 세월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험해지는 외삼촌과 외사촌들의 안색에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만, 고향도 그에게는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분노로 떨던 형 에서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향가는 길목에 있던 얍복강 나루에서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순과 과오로 얼룩진 자기의 과거와 진지하게 맞서기 위해서 가족들을 먼저 강 건너로 보내놓고 한밤중에 홀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겁니다.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재산과 가족이라는 것도 더 허망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사투를 벌렸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그 씨름으로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환도뼈는 남자의 힘의 근원을 가리키는 말이니까,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왔던 삶의 방식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 밤이 그에게 비극의 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밤에 그는 야곱이라는 부끄러운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야곱으로 태어난 이스라엘로 환골탈태한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 브니엘을 지나
그가 아픈 다리를 끌며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습니다. 브니엘은 '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지난밤에 그는 소중한 것을 잃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다정한 얼굴이 그를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형을 만날 일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몸을 일곱 번씩이나 굽히면서 형을 향해 나아갑니다. 꿈속에서라도 만날세라 두려워했던 에서의 얼굴이 눈앞에 있습니다. 늘 분노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지던 그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돌아온 동생이 그저 대견한 듯 싱글벙글하는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재회의 눈물을 흘리는 형이 그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달려와 동생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체면과 예법을 파탈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합니다. 과연 에서답습니다.

옛날의 서운했던 감정의 찌끼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야곱은 목이 메었지만 차분하게 자기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형에게 솔직한 자기 심정을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형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지난날에 매이지 않고 흔쾌히 형제를 받아들이는 에서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그런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야곱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 두 형제의 화해사건을 돌아보면서 해방된 지 59년이 지나도록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전쟁까지 치른 우리가 언제쯤이나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경제력이 생기면서 패권주의 정책으로 선회한 중국과 오만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강토에는 짙은 먹장구름이 드리워 있습니다. 이 먹장구름이 언제쯤 걷힐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길은 하나뿐입니다. 분단이 극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변방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얍복강의 어둔 밤에 처하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을 통해 우리가 새로워지면 새로운 태양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분단으로 찢기웠던 이 한반도가 새로운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분단의 세월로 인해 남과 북의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가슴에 입힌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아 통일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이 온전치 못하지만, 피차 서로에게 행했던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를 다시금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면, 그래서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 비전을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꿈을 잃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광복절 기념 절기에 하나님의 온유한 빛이 우리 강토의 구석구석에 비쳐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8월 15일 15시 21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