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4. 신앙은 계산이 아니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9:27-30
설교일시 200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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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계산이 아니다
마19:27-30
(2004/8/22)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얻는 길을 여쭸습니다. 그 젊은이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당돌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묵직합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합니까?"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여기까지는 문답이 속도감이 있고 막힌 데 없이 경쾌합니다. 그 부자 청년의 목소리는 자부심에 차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질문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이 그를 걸려 넘어지게 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대답은 절벽이었습니다. 그것은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모든 재산의 포기와 영생을 놓고 저울질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수심에 찬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부자 청년은 아주 매력적이고, 젊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관심이 영생인 바에는 요즘 말로 2퍼센트쯤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 2퍼센트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 인생의 불을 피우는 방법을 배웠는가?
유대인 랍비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이가 대장장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유능한 대장장이의 도제가 되어 온갖 필요한 기술을 다 익혔습니다. 풀무질하는 법, 화젓가락 잡는 법, 큰 망치 쓰는 법, 모루 치는 법, 담금질하는 법 등을 모두 배웠습니다. 도제로서의 수련기간이 끝나고 그는 왕궁의 대장간에 고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취업에 대한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불 피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도구들을 다룰 수 있는 그의 기술과 지식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184쪽).

예수님을 찾아온 그 부자 청년은 인생의 불을 피우는 방법을 배울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로 하여금 영생의 문턱에서 돌아서게 만든 것은 바로 소유의 넉넉함이었습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으로 변했던 것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다 지켜본 베드로가 이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27)

'보십시오, 우리는'이라는 말은 부자 청년과 대비되는 제자들의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말이 유난히 도드라집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가정을 돌보는 책임까지도 어쩌면 저버렸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 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최초의 휘황한 꿈조차 퇴색시키게 마련입니다.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의 밀어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말로 변하고, 장미꽃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빛이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바뀌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견디어 낸 사랑, 시간을 견디어 낸 꿈과 이상이야말로 소중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꿈을 위해 익숙했던 삶의 방식을 떠났지만, 그들의 꿈은 조금씩 퇴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의 생각이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헌신이 얻을 보상은 과연 무엇인가?'

● 보상에 대한 기대 없는 경건은 가능한가?
베드로가 보상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을 때 다른 제자들도 솔깃했을 겁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주일날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봉사활동에 동참하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의 한 부분을 덜어내 헌금을 바치는 이런 헌신에 주어질 보상은 무엇인가?' 욥기에서 사탄은 욥의 경건에 대해서 이렇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욥이,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욥기의 주제는 의인이 겪는 고난이 아니라, '보상에 대한 기대 없는 믿음이 가능한가?'입니다. 사탄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건 불가능한 것일까요?

벌써 여러 해 전입니다만, 저는 감리교청년연합회 신입생 환영회에 와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이 하도 간곡해서 어려운 시간을 쪼개서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혼자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들이 강사료랍시고 봉투를 내밀 텐데,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저를 정답게 맞아주었고, 예배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무도 따라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늑장을 부리는 데도 결국은 아무도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까 막 화가 나요. '이런 버릇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구. 도무지 예의가 없네.' 저녁에 기도를 하는 데, 그 일이 자꾸 생각이 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더군요. 그런데 주님이 제게 말을 건네오셨습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니?"
"제가 지금 화가 안 나게 됐습니까?"
"이상하구나, 너는 애당초 강사료를 주면 돌려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었니?"
"그랬지요."
"그러면 일이 제대로 된 거 아니니? 번거롭게 돌려줄 필요가 없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그래도 그렇지요. 누군가 나와서 '죄송합니다. 강사료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인사만 했더라도 저는 아주 기분 좋게 돌아왔을 겁니다."
"내가 보기엔 너를 화나게 만든 건 그 청년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너의 허영심인 것 같구나."

저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밤에 저는 하나님 앞에서 크게 회개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상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는 한 어떤 일도 순수한 기쁨 속에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합니다. 말로는 순수하게 헌신한다고 하면서도 속셈은 딴 데 있을 때가 많습니다.

● 하늘 아기(天倪)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른 자기들이 받을 보상이 무엇이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친절하게 대답해주십니다. 질문자의 수준에 맞추어서 대답하시는 겁니다.

첫째, 보좌의 약속입니다. 주님은 새 세상에서 인자가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그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법정에서 배심원단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귀가 솔깃한 약속이지요? 하지만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사람들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열 두 보좌는 무엇이며, 심판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잘잘못을 드러내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맑게 닦인 거울이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듯이 그들은 순수하고 소박해져서 어떠한 시비에도 시달리지 않고, 차별의식에 매이지 않은 '하늘 아기'(天倪, 蔣子의 [齊物論])가 되어, 사람들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드러내주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이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주님을 위해 가족관계와 소유물을 희생한 모든 자들은 그 여러 배를 보상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여러 배라고 했지만 원문은 백 배입니다. 물론 백 배라는 것은 그 풍부함을 나타내기 위한 시적 언어이지, 수학적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이 받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은 영생입니다. 이 약속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어 예수 곁을 떠났던 부자 청년을 떠올려줍니다. 영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희생했는지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우리가 포기한 것은 무엇인지요?

셋째, 중요한 것은 보상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주님은 보상에 대한 기대가 제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음을 알기에 경계하는 뜻으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스스로를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자꾸만 비워 깨끗하게 한 사람이라야 마지막 날에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남과 자리를 다투어 앞장서봐야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 '뒤로 돌아' 하고 말씀하시면 극적인 뒤집기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서열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남보다 앞서고 싶어합니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복보다는 눈에 보이는, 그래서 계량화할 수 있는 복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을 너무나 사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은 계산이 아닙니다. 투자도 아닙니다. 받아들여짐에 대한 감사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음에 대한 감격이요, 거기에서 연유한 헌신입니다. 보상에 대한 생각을 우리 마음에서 지워버릴수록 우리 기쁨은 순수해지고, 감사는 깊어질 것입니다. 보상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깊은 은혜의 세계에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8월 22일 15시 31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