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5. 눈을 뜨면 보인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1:25-30
설교일시 200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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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보인다
마태11:25-30
(2004/8/29)

● 바람이 드셀수록
아침 일찍 옛 제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더군요.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대뜸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복잡하고 힘드냐?"고 되묻더군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엉성하게 위로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내려오는데 이정하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거리에 나가보면 시름에 잠긴 얼굴들이 참 많습니다. 발걸음이 급한 이들은 있지만, 경쾌한 발걸음을 보긴 참 어렵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경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건 몸으로 느끼는 거니까 거짓이 아닙니다.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물론 참 삶이란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도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안으로는 근심이고 밖으로는 우환이 그칠 새 없습니다.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이들의 형편이 꼭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마태는 그 마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9:36)

목자가 없다는 것은 삶의 전망을 잃었다는 말로 알아들으면 됩니다.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현실에 짓눌려 지향해야 할 목표를 잃어버린 겁니다. 삶의 고갱이[초목의 줄기 한가운데의 연한 심으로 사물의 핵심을 가리킴]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싶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힘겨울망정 삶을 곧추 세워 신명나게 살아갈 새 힘을 그들에게 주고 싶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급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9:38)

● 실패는 깨달음의 문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앓는 사람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이런저런 세상일에 매여 복닥거리다가 그만 짜부라든 생명들을 고쳐 온전케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도 여러 고을을 찾아가셔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가르치고, 또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든 그들 속에 희망의 불꽃을 지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일어나는 기적은 반기면서도, 그가 전해주려는 삶의 희망은 외면했습니다.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뵙지는 못 했지만, 예수님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셨을 것입니다.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그리고 화를 냅니다. 그의 완악함을 탓합니다.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우리의 선의는 열매는커녕 우리 속에 화만 키운 격이 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도, 다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건 또 다른 영적 교만이요 욕심입니다. 우리는 결과에 매이지 않고 선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의에 대해서 상대편이 늘 감격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인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저 선을 택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반 대중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바로 이런 사실을 절실히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11:25-27)

어쩌면 이 대목에서 무릎을 탁 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그 말씀과 영혼으로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똑똑하다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온 몸과 마음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안다' 하는 것이 병인 줄은 아시지요? 그것이 지식이든 경험이든 지위든 '안다', '가졌다' 하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시건방지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우리의 거짓 자아를 강화시킵니다. 자아의 벽을 높이 세우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어린아이들입니다. 스스로 어리석고 부족하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섭리를 향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방어해야 할 '자아'가 없거나 그렇게 단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천국 식 삶의 방식
주님은 이제 선교의 전략을 바꾸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율법이라는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생은 선물이 아니라, 부담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생명의 기쁨을 만끽하며 살게 하고 싶으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지도자연 하는 사람들은 그런 주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고 가는 짐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 사람들의 팔자라고 해도 문제는 다른 이들의 어깨에도 그 짐을 올려놓아야 속이 시원한 그들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율법 조문에 매여 사는 이들을 은총의 세계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으로도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 인생의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합니다만,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바람을 타는 일인진대 인생의 짐에 짓눌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포기하고 싶고, 때로는 달아나고 싶지만, 그래도 그 짐을 지고 사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짐을 부리고 바다나 강을 운행하는 배들은 배 밑바닥에 바닥짐(ballast)을 싣고 갑니다. 배의 무게 중심이 위로 뜨면 작은 파도에도 전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짐과 부담이 우리 삶에 유익합니다. 세상에 힘있다 하는 이들은 자기 짐을 남에게 떠맡기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초대에 응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짐이 무겁기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속히 그 짐을 벗고 싶어합니다. 오락 프로그램 가운데서 부풀어오르는 풍선을 주고받으며 제시된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여유있게 말을 하지만 풍선이 커질수록 상황은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긴장되고 말은 빨라지고 논리는 사라지고 오직 떠넘기자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이 이런 거 아닌가요?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 어깨에서 그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 생의 짐은 우리가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짐을 벗겨준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이일 것입니다.

주님은 대신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이건 좀 가혹한 요구처럼 들립니다. 짐을 벗겨주시지는 못할 망정 십자가까지 지라고 하시다니요? 하지만 바로 그것이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주님의 멍에를 메고 갈 때 우리 짐은 가벼워집니다. 이것은 이론도 논리도 아닙니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실입니다. 짐을 벗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잘 지고 가야 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멍에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건강에 어려움을 겪던 이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덤으로 병이 나은 분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온통 부정적으로 보던 이가 남을 위한 봉사 활동에 나섰다가 자기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 이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내 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남을 복되게 하는 것보다 좋은 길이 없습니다. 남을 복되게 하면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 우리 삶은 바탕에서부터 건강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 식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눈을 뜨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처럼 떠야 할 마음의 눈을 감고 삽니다. 갈증을 호소하면서도 샘물을 길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진리를 피하면서 찾는 것입니다. 조선조의 선비인 서화담(徐花潭, 화담은 徐敬德의 호) 선생이 출타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 섰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박지원은 이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색깔과 모양에 정신이 뒤죽박죽 바뀌고, 슬픔과 기쁨에 마음이 쓰여서 이것이 곧 망상이 된 것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지키는 이치요, 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 증명으로 찍은 도장)입니다."(『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인생인데, 우리는 색깔과 모양에 취하여 정신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이제 세상에 눈 감고 유혹에 귀 막고 주님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인생은 축제가 되고, 세상은 온통 신비가 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 사람들, 그들을 통해 주님은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내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이웃들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통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탈북자/이주 노동자/달동네 주민/노숙자/소년소녀가장/장애인들은 우리 믿음이 진실한지를 가늠해주는 시금석들입니다.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 탄식하는 세상에서 다른 이들의 사는 맛을 되찾아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보다 멋진 도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청파 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이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답하여 하나님 나라의 초석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8월 29일 15시 15분 3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