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6. 일상을 천상으로
설교자 김재흥
본문 마가복음 9:2-29
설교일시 2004-09-05
오디오파일 s040905.mp3 [471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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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만 싶네

제가 좋아하는 가수 김광석이 부른 노래 중에 [변해가네]라는 곡이 있습니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했지
그리 길지 않은 나의 인생을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내밀며 함께 가자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 곳으로만 고집했지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나의 길을 가기보단 너와 머물고만 싶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너무 쉽게 변해가네
너무 빨리 변해가네

맘 속에 그리던 사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와 머물고만 싶어집니다. 머묾에 대한 욕구가 커지게 됩니다. 그런 사랑뿐 아니라 살면서 가야 할 길을 앞에 두고도 우리를 쉽게 일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자꾸만 머물도록 붙잡아두려는 마력에 부딪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에게 변화산으로 알려진 산에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오르게 되는데 베드로도 바로 거기서 이 머묾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셔서 그 옷에서 광채가 나고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서서 말씀을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실로 놀랍고 영광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옛날 유대에서는 귀한 손님이 왔을 경우 특별히 자신들이 쓰는 거처와 구분되는 초막을 지어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을 편안히 모시려는 배려지요. 이처럼 베드로는 그 황홀한 광경에 넋을 잃고 너무도 좋아서 초막 셋을 지어 모두가 함께 산 위에 머물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바쁘고 분주하고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휴일을 맞아 교외라도 나가게 되면 공기가 얼마나 신선하며 하늘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난 여름 휴가때 강원도에서 돌아올때였습니다. 태백을 벗어나 영월을 넘어오면서 그 푸르른 산줄기와 청아한 하늘, 맑은 계곡물을 두고 핸들을 서울로 돌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가 절로 나오더군요. ‘주님, 저 서울로 돌아가면 분주함이 있습니다. 피곤함이 있습니다. 바쁜 일상이있습니다. 게다가 바로 옆 자동차 공업사에서 낮밤 가리지 않고 쏘아대는 총소리와 쇠 갈아대는 소리, 페인트 냄새가 있습니다. - 여기서 총소리란 차 바퀴를 빼기 위해 사용하는 타다다당 소리를 내는 기계의 소리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난 이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 이스라엘 전국 곳곳을 다녔습니다. 하루종일 예수님과 말씀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아픈 이들을 돌보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밤에는 정해진 잠자리 조차 없던 불편하고 피곤한 일상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그 변화산의 광경은 보암직도 하고 머묾직도 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산에 베드로는 머물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산아래로 내려가셨기 때문입니다. 피곤하고 힘들기로 치면 예수님이 베드로보다 더 하셨을터인데 예수님은 그 황홀경에 머무시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일상으로 흘러가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교훈,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향심기도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향심기도라하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2,30분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거룩한 한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기도라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바르고 고요하게 앉아 하나님만을 향하며 머릿속에 자꾸 들어오는 모든 상념과 사고들을 ‘하나님’, ‘주여’ 와 같은 한 단어를 떠올리며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셨던 것으로 아는데 이 기도는 무엇인가를 붙잡고 묵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설교말씀을 묵상하는게 아닙니다. 여러 잡념들에 사로잡혀서도 안되지만 거룩한 것같은 메시지나 이미지에도 머물면 안됩니다. 일체의 것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향심기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중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 계신 것을 보게 되더라도 그냥 흘려보내라’ 사로 잡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기도의 궁극점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입니다. 저는 이 둘은 서로에게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없이 흘러가는 일상이나 일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대화 모두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 둘은 기도의 양 꼭지점으로 존재해야하며 우리의 생활은 이를 중심으로 그려지는 타원형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대하는 자세 (벗어나야 하는 것: 받들어야 하는 것)

제자들과 함께 내려온 예수님 앞에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과 서기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무슨 문제가 터졌나봅니다. 자초지정을 살피니 한 사람이 벙어리 귀신이 들려 땅에 꺼꾸러지기도 하고 거품도 흘리고 이도 갈고 점점 파리해 가는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 했는데 그들이 못 고친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옆에서 지켜보던 서기관들이 ‘왜 못고치냐?’ 따지듯 묻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뒤에서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거봐유, 지가 그냥 산위에 있자구 했잖아유. 거기 있었으면 이런 복잡한 일도 신경 안쓰고 얼마나 좋아유’ 정말 그런 생각이 들법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평범함, 무료함도 있지만 아픔, 예기치 못하던 문제, 다툼, 분주함, 사람들이 모이며 생기는 웅성거림이 끼어들때가 많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그런 문제를 제공한 사람과 그로인해 힘들어하는 자신에게서 다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도피처를 찾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욱 문제가 커집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결국 제자들은 아이도 못고치고 ‘왜 고치지 못하는가’에대해 그 아버지와 주위의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힘들수록 더욱 일상을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직면한 문제도, 그로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나의 삶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를 불러 더 깊이 자초지정을 듣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 아비와 아들의 아픔을 살피십니다. 그리고는 그 아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믿음을 이끌어 내십니다. 제자들의 방식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질병과 질고로 고통당하는 이들의 삶을 향한 연민과 긍휼. 사람들을 대할 때 해결해야하는 하나의 문제꺼리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능태로 보시는 자비로움. 예수님은 그것으로 그들의 삶의 아픔을 헤아리시고 그들의 일상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후 그 비결을 조심스레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과연 기도를 안했을까요?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왜 일까요? 삶의 문제들을 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며 하나님게 부르짖는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은 때 자신들을 찾아온 벙어리 귀신들린 한 아이가 만들어낸 상황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한 두 번 시도해 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자, 점점 그 상황을 벗어나고픈 욕구가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 아이를 향한 긍휼, 사랑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문제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곧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들 정말 기도 많이들 합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는 자꾸만 교회가, 종교가 해결해 주어야한다고 여러 문제들을 가져오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진정 함께 아파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도 귀기울여 듣지 않고 그들 또한 나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가능태로 보지 아니하고는 쉽게 기도하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핑계를 둘러대기 위한 논쟁을 벌일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책임이 아니라느니, 교회성장이 먼저라느니...


천상(千常) ? 천상(天常)!

세상 사람들은 정말 평범한 삶, 일상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10억 만들기다, 로또대박이다하여 경제적으로 남들보다 여유롭고 풍족하여 과시하며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분량으로서의 일상을 뛰어넘어 2상, 3상, 10상, 1000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더 가지는 만큼 이 세상 누군가가 덜가지게 되고 그의 일상이 깨어져 나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본 드라마였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 손에 요술지갑이 들어오게 됩니다. 말 그대로 요술지갑이라 오늘 있는 돈을 다 쓰면 내일 또 지갑 안에 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기해하면서도 돈을 펑펑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텔레스 같은 사나이가 등장하여 말합니다. ‘어떻게 돈은 잘 쓰셨나?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봤나? 내가 보여주지’하고는 매일 지갑에 저절로 생기던 돈이 있던 곳으로 데려가 줍니다. 어려운 살림에 아들 대학 공부시키려 모은 어떤 어머니의 적금, 갑작스런 교통사고가 나 치료비로 쓸 돈... 다들 사연있고 그들에게 모두 중요한 돈이었고 그 돈이 갑자기 없어지가 삶이 파괴되고 혹은 죽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 의문의 사나이에게 요청합니다. ‘제발 이 지갑을 내게서 가져가 달라고’

우리 크리스찬들은 일천 천 천상이 아니라 하늘 천 천상의 삶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일상이 가능치 않은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저 변화산 위에 머물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일상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되고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귀머거리 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신 것이나,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나, 눈먼자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이나 다 그들의 일상을 회복시키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지금 벙어리, 귀머거리 귀신 들린 아들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씩만 돕는다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그 나눔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입니다. 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그 모두가 우리가 도울 수 있고 도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도 캘커타의 성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마더 데레사. 그녀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통해 하늘을 맛본 사람들은 수천 명이 넘습니다. 그녀는 진정 일상을 가지고 천상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하나님 손에 쥐어진 한 자루 몽당연필이라고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남들처럼 빼어나고 뛰어난 것 없지만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시도록 했을때 수많은 이들의 일상 회복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더군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 천국 간다고 천국의 삶을 살겠느냐’고.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천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내 욕심에 머물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고 하나님 주신 일상으로 흘러들도록, 하나님이 주신 호흡으로 일상을 받들며 살도록, 주위에 일상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움으로 우리들의 일상이 천상이 될 수 있도록.

등 록 날 짜 2004년 09월 05일 18시 31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