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7. 골수 그리스도인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5:34-42
설교일시 200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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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그리스도인
행5:34-42
(2004/9/12)

● 기득권자들의 현실 인식
"소방관과 앞 못 보는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느냐"는 싱거운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답은 앞 못 보는 사람이라더군요. 소방관도 대단한 싸움꾼입니다. 물불 안 가리고 싸우니까요. 하지만 앞 못 보는 사람은 더 무섭습니다. 아무 것도 뵈는 게 없으니 무서운 것도 없다네요. 장애를 입고 사는 이를 등장시키는 게 좀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냥 웃고 말면 됩니다.

여기 세상에 도무지 무서운 게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연행된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내렸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과 공의회의 분위기만으로도 웬만한 사람들이면 주눅이 들 법도 하건만 사도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허리가 반쯤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한 공의회 의원들에게 오히려 설교조로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들리게 마련입니다. 이 말은 제도나 관습보다는 현실 속에서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산헤드린 공의회원들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비난의 채찍질이었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에 더 마음을 쓴다는 비난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정말 뵈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허물, 혹은 그림자가 누군가에 의해서 폭로될 때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일단 화부터 내고 보지요. 그때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받은 바 모욕에 대한 앙갚음만이 절대가 됩니다. 광기가 그들을 휩쓸어갑니다. 이런 화냄 혹은 광기야말로 그들의 거짓을 드러내는 징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다른 데 있습니다. 그들은 교활합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폭력을 행사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화가 나도 그 화를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습니다. 근거가 없으면 조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책임을 면하기 위한 그들 나름대로의 조치입니다. 많은 공무원들이 일의 경중이나 우선 순위에 따라서 책임적으로 일하기보다는 감사에 대비해서 일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이나 정의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끄는 동기는 이익과 안전입니다. 기득권자들인 공의회원들은 남의 칼을 뽑아 남을 찌르고도 남을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사도들의 모습은 얼마나 맑고 당당하고 자유롭습니까? 그들은 거의 호랑이 굴 앞에 선 격이 되었습니다.

● 성찰적 지식인, 행동하는 지식인
하지만 어떤 집단에도 눈을 뜬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광기의 폭풍에 내몰릴 때에도 홀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교의 진보적인 학파인 힐렐 학파를 대변하는 대학자입니다. 누가는 그를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한때 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는 공의회에서도 유력한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폭력의 광기가 사도들을 삼키려는 순간 홀로 일어나 사람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는 잠시 사도들을 밖에 나가 있게 한 후에 일어나서 공의회원들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습니다. 그는 사도들을 처리하는 일에 신중을 기하자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물론 가말리엘은 복음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일을 감정적으로 또 순전히 이해 관계에 따라 성급하게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의 도'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시간의 심판에 맡겨보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예로 드는 것이 유다와 드다입니다. 유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제국 내에 있는 모든 민족이 호적정리를 할 때 조세저항을 이끌었던 유다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드다는 주후 44년 경부터 일종의 메시야 운동을 이끌었던 몽상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지만 지도자의 죽음과 더불어 그들의 운동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운동이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면 태풍이 소멸하듯 소멸해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권고이기는 하지만 그의 말과 태도에는 두 가지의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말이 자칫하면 업적주의·결과주의를 승인하는 말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재정규모가 늘어난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는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의 신중론이 역사에 대한 방관주의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감당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 뜻 앞에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가말리엘은 성찰적 지식인이기는 하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은 사도들을 구하기 위해 가말리엘을 들어 쓰고 계십니다. 이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예수와의 운명적 연대
산헤드린은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겨서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다시 한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공허한 명령을 한 후에 놓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 담긴 쓰라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짐승 뼛조각이 부착되어 살점을 파고드는 채찍에 맞은 것입니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매를 맞다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데도 그들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누가는 그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짤막한 진술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뼛속을 파고드는 고통은 그들을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는커녕, 예수님의 운명과 깊이 결합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이제 관념이 아닙니다.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와 멍에를 함께 맴이요, 운명을 나눔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건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외적으로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적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들을 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분"(렘20:12)이라고 고백합니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라 하지요? 고난의 연대를 통해 그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얻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딴 유도선수 이원희씨를 기억하시지요? 아마 생생하게 기억나실 겁니다. 결승전에서 상대를 멋지게 눕힌 후 그는 매트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손을 하늘로 들어올렸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무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선수촌에서도 전도사로 통할 정도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답니다. 시상식이 끝난 후 인터뷰 석상에서 손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는데도 마취제 없이 결승전을 치른 게 사실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의료진이 그에게 마취제를 놓아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핏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게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시는 주님이었답니다. '그래, 주님은 신포도주를 거절하면서 고통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는데,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나의 고통은 사소한 것 아니냐.' 그러면서 그는 "마취제를 맞으면 자신의 의지가 약해질 것 같아서 마취제 투여를 거절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쯤 되면 골수 그리스도인이라 할만합니다.

고통은 때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결합시켜 줍니다. 그 고통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고통의 연대를 통해 영적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작은 어려움 앞에서 쩔쩔매지 않습니다. 大死一番 事後蘇生이라지 않습니까? 한번 크게 죽고 나면 다음에는 사는 일만 남는 겁니다.

● 증인으로서의 삶
고통을 통해 예수의 운명과 깊이 연결된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가르친 겁니다. 그들의 증언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논쟁에 뛰어들 생각도 없었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를 전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삶을 전할뿐이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고전9:16)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예수의 거죽만 만지다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이들을 성전의 '마당만 밟는 이들'(사1:12)이라 했습니다. 다소나마 예수의 교훈에 귀기울이고 또 그 뜻을 따라 살아보려고 하지만, 세상일에 치여 번번이 복음적 삶에 실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절반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골수를 얻은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자기도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세상과 이웃을 대하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왕 예수를 믿었으면 골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가 예수의 골수를 얻은 신앙인들이 되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복되게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않는 참 자유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9월 12일 15시 20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