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8. 빛의 알갱이 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벧전1:1-5
설교일시 2004/9/19
오디오파일 s040919.mp3 [3887 KBytes]
목록

빛의 알갱이 되어
벧전1:1-5
(2004/9/19, 교우 만남의 날)

● 내 인생의 사과나무
<사과나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몇 번 보지 못했지만 볼 때마다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특히 '내 인생의 사과나무'라는 코너는 유명인사들을 등장시켜서, 좌절의 순간, 견디기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오늘의 그들이 있게 한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내 인생의 사과나무', 그것은 언제나 크고 멋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고 볼품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김훈 선생의 사과나무는 '밥'이더군요. 밥을 먹고사는 문제가 그에게는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인생의 사과나무가 있을 것입니다. 딸에게 네 인생의 사과나무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주 간단하게 없다고 하더군요. 하기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온 이들에게 인생의 사과나무가 도드라져 보일 리가 없지요. 저는 마음이 각박해지고 지칠 때마다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리곤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의 결기가 녹아내리는 것을 저는 자주 경험했습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저는 박창운 권사님과 강원도 진부에 있는 어느 집 뒤란에 앉아 벌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병정벌들은 낯선 침입자가 없는지 감시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일벌들은 꿀을 물어오느라 분주했습니다. 벌통에 바람을 불어넣느라 한 줄로 나란히 앉아서 열심히 날갯짓하는 벌들의 붕붕거리는 소리는 몽환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의 대화는 깊은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권사님은 할머니로부터 들은 당신의 유아시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3살이 되었을 때 잇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으로 권사님은 죽음은 문턱에 서있었습니다. 손자를 살리고픈 할머니는 아기를 들쳐업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병원인데, 일제가 패망하여 그 의사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기를 받아 수술대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술을 하기에 앞서서 야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의사 선생의 도움으로 권사님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권사님은 당신을 살리신 것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으로서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 사건이 권사님의 근본체험이었던 셈입니다.

작년에 회갑을 맞으신 제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이 들려주시는 등불 이야기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1958년에 그는 대광고등학교 일학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경기도 연천군 상리로부터 200여 리 길을 기차로 통학해야 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들판 한가운데 있는 역사(驛舍)도 없는 간이역에 내리면 밤 9시가 되었고, 겨울에는 볼을 에는 듯한 매운 하늬바람이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외로움 속에서 산중턱을 올려다보면 깜박거리며 비치는 등불이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것은 늦게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쪽마루 끝에 있는 기둥에 걸어둔 아버지의 등불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게 위로가 되었다'고 거듭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장년이 된 아들은 고백합니다. "그 등불은 아버지가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날마다 밤마다 내 영혼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등불은 한 사람을 위하여 등불을 내건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사님께는 '아버지의 등불'이 인생의 사과나무인 셈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경험을 그렇게 선명하게 그려낼 수는 없다 해도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인생의 궤적을 가만히 돌아보면 기억은 징검다리를 닮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기를 우리는 몇몇의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꼭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사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삶에서 우리 청파교회가 '인생의 사과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 세상에 흩어진 나그네
베드로 사도는 세상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나그네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뭔가에 대한 노스탤지어(nostalgia, 鄕愁)를 불러일으킵니다.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영혼이 침체되어 있을 때 우리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 떠남은 돌아오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성도들을 가리켜 좀 더 분명하게 '본향찾는 나그네'(11:13-16)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지만, 이곳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 생명을 지으신 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행장을 가볍게 하고 언제라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딧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오딧세이아가 아내인 페넬로페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 이타카를 향해 가는 여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느 날 오딧세이아 일행은 풍랑에 떠밀리다가 로토파고이족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됩니다. 원주민들은 오딧세이아의 부하들에게 '로토스'를 먹으라고 주었는데,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은 이들은 귀향은 잊어버리고 그곳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오딧세이아는 그들을 억지로 배 있는 곳으로 데려가 배 안에다 그들을 묶고는 지체없이 그곳을 떠나버립니다.

어쩌면 우리도 세상의 단맛에 취해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바로 그런 삶을 가리켜 '타락'이라 하는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15:1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속된 삶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 새로운 별자리
하지만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려면 외로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어스름녘이면 외로움은 더욱 커집니다. 예수님도 외로우셨습니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법정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

외로움이야말로 나를 나되게 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길벗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며 빛을 발합니다. 개개의 별을 보면 외로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별무리를 전체로서 보면 외롭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사람들의 상상력은 별들에게 연대성을 부여해 성좌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사자자리, 전갈자리, 쌍둥이자리…. 어두운 밤 같은 이 세상을 밝히는 새로운 별자리가 있습니다. 청파교회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이든, 잠시 떠나 있는 이든, 누구라도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그 성좌에서 빛을 발하는 이들입니다. 홀로인 것 같아 눈물겨울 때에도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함께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가슴에 '내 인생의 사과나무' 한 그루로 우뚝 서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빛의 알갱이가 되어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입니다. 오늘을 계기로 해서 우리 청파의 모든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빛나는 새벽별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세상의 어둠을 사르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9월 19일 15시 31분 2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