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9. 신뢰의 도약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5:1-11
설교일시 2004/9/26
오디오파일 s040926.mp3 [633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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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도약
눅5:1-11
(2004/9/26)

● 우리 삶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주님
우리는 가을의 분기점인 秋分을 지나 한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추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라지만 올해는 바로 오늘에 이르러서야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아 진답니다. 이제 내일이면 밤이 조금 길게 되겠지요. 우리는 계절의 경계선을 넘고 있습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임계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삶에도 임계점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바로 그 때가 그의 삶의 임계점이요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상한 종교 체험을 가리켜서 어떤 이들은 문지방을 넘는 경험이라고 말하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방과 마루가 갈라지듯이, 주님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은 달라지게 됩니다.

평화롭지만 쓸쓸한 게네사렛 호숫가, 아침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일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그들은 그물을 손질합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아달라고 하십니다. 시몬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주님의 지시대로 합니다. 예수님은 배를 강대상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John Wesley 목사는 "세계는 나의 교구"(The world is my parish!)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이 전해져야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가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의 현장을 찾아오십니다. 상인들의 가게에도 오시고, 교사들의 강단에도 오십니다. 직장인들의 사무실에도 오시고, 노동자들의 일터에도 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귀가 어두워서 참 소리를 가려듣지 못할 때가 많을 뿐입니다.

● 말씀에 따라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고기잡이라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시몬이 전문가입니다. 아침 햇살이 물 속에까지 비쳐들면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시몬은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과 오랜 경험과 겨루는 일입니다. 그는 그런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주님의 말씀은 때때로 불합리해 보입니다. 터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고 했습니다.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학이나 과학적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앎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합리성을 내포하지만, 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서재에 앉아 연구를 하던 아인슈타인의 펼쳐진 책 위에 풍뎅이 한 마리가 툭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진귀한 손님을 보면서 문득 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도 이런 풍뎅이 한 마리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이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신비입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고 어느 시인은 말합니다만, 이 우주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둠의 부분이 더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라는 한 존재 앞에서 계산을 단념합니다. 재보고 달아보는 짓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그것은 신뢰의 행동이었습니다. 많은 고기떼가 잡혔습니다. 어부인 시몬으로서는 기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은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는 주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을 보았습니다. 놀람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그의 눈길은 곧장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그는 나름대로는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자기 삶이 많은 부분에서 비뚤어져 있었음을 자각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 매혹과 두려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 존재가 문제임을 자각합니다. 그는 예수를 붙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에게서 멀어지고 싶어합니다. 빛 앞에서 자신이 어둠임을 자각한 인간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거룩’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떨림을 동반한 매혹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매혹은 잡아당기는 힘(引力)이지만, 두려움은 밀어내는 힘(斥力)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태도에서 이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말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에게 확고히 사로잡히고 싶다는 소망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서울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하던 참 외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쌀과 밑반찬을 가지고 아버지가 올라오시면 세상을 얻은 듯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더 큰 아픔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시골로 돌아가시는 날 아침이 되면 가슴 저편에서부터 서러움이 복받쳐올라 저는 침울해지곤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납니다. 아버지가 떠나시기로 되어 있던 어느 날 아침 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빨리 가세요. 갈 테면 빨리 가세요. 다신 오지 마세요.” 그 말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임을 나도 알고 아버지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식민지 백성의 울화를 삭이며 숨죽인 채 살아가는 것, 때로는 겁 많은 자의 용기로 기존 체제에 저항해보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가리켜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이면을 본듯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선언하듯 말씀하십니다.

● 소명받은 자의 새 삶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는 새로운 소명 앞에 섰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절망의 바다에 떠밀리는 사람들을 희망의 포구로 인도하는 일, 자기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 인간성이 황무지처럼 변해버린 삭막한 세상에 사랑의 물을 공급하는 일…. 그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초대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툭하면 세상 탓하고, 형편이 좋다고 웃고 형편이 나쁘다고 우는 게 우리들인데, 하나님은 우릴 보고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사람들 사이의 불화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세상에 나가 그 골을 사랑과 신뢰로 메우자고 하십니다. 물론 그 일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과가 신통치 않다 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태기 하나 정도라도 희망의 흙을 나르겠다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 정신의 키는 한 뼘쯤 커집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우리는 몽당연필처럼 볼품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몽당연필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성경은 주님의 초대를 받은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아주 단순하지만 힘있게 전해줍니다. 아니, 단순하기에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새 세상을 이루는 일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가능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 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복음송 중에 <빈손의 기도>가 있습니다. “두 손을 모으기 위하여 가진 것 모두 다 버렸네/세상에 눈 감고 유혹에 귀 막고/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네” 두 손을 모으기 위해서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꾸만 내려놓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도, 든든한 배경을 만들려는 욕망도, 허영심도,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도 말입니다. 내려놓으면 자유로워집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하지요? 어떤 복을 원하세요? 세상이 정해놓은 행복의 조건들을 채워가는 복인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이러저러한 일들에 끄달리지 않는 내적인 자유보다 더 큰 복이 있나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일보다 더 귀한 복이 있나요? 저는 우리 교우들이 그런 복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겹지만, 위험하지만 상식을 거스르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시몬은 주님의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체험했을 때 시몬은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길 떠날 수 있었습니다. 신뢰의 도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삶에 자기의 삶을 기꺼이 걸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어떤 가치에 삶을 걸고 계십니까? 주님의 일을 위해 내가 포기한 것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9월 26일 15시 52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