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0. 기억의 성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민17:6-11
설교일시 200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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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성사(聖事)
민17:6-11
(2004/10/3)

● 우리 삶을 부축해 주는 것들
<<토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박경리 선생님은 지금 살고 있는 원주를 떠나 서울에 올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고 말합니다. 혈육과 친지, 많은 친구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35년간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묻어둔 서울, 그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돈암동 길모퉁이를 스쳐가던 바람, 정릉 골짜기의 물소리, 서대문 하늘가의 그 붉은 노을이며, 그리고 흑석동 고갯길을 오르내릴 때 내려다보았던 한강, 겨울 철새들은 애처로운 몸짓을 하고-그런 것들이 고달팠던 삶을 그 얼마나 받쳐주고 부축해주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더함도 덜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품이 얼마나 넓고 포근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생명의 아픔>> 중에서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을 부축해주는 것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덤덤하게 지나는 일상의 풍경조차 큰 울타리가 되고 힘이 되어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삶이 힘겨울지라도 우리는 그 삶을 사랑합니다. 견뎌온 시간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60년대의 시인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라는 시에서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추억, 혹은 기억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F 영화인 <블레이드 러너>는 인조인간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미래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별에서 반란을 일으켰기에 지구 출입이 금지된 인조인간들이 지구에 잠입했습니다. 그들을 솎아내기 위한 검사가 진행됩니다. 그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들이야말로 인간의 정체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먼저 사람들은 인조인간으로 의심되는 이들의 눈을 들여다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지요? 눈의 움직임 속에서 감정의 움직임을 읽는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질문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주입받은 인조인간들은 합리적인 질문에는 대답을 잘하지만 논리를 뛰어넘는 비합리적인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방법은 기억을 반추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기억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없습니다. 인조인간들에게도 자라남과 성숙의 시간이 없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말해보라는 요구 앞에서 그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습니다.

● 공동의 기억
가족이 소중한 까닭은 혈연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동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역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살면서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었던 공동의 기억이 있기에 든든하게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흔히 치매라고 알려진 알츠하이머 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는 수녀가 있었습니다. 공동체는 그 수녀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습니다. 다른 수녀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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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이 방 문앞에 그의 이름을 커다랗게 써 놓았어요. 자신의 방을 기억하길 바라면서요. 때때로 그는 고집을 부리며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죠. 의사가 그에게 자주 질문을 하라고 해서, 한번은 제가 찾아가서 물었어요. '수녀님,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그는 화가 나서 소리질렀어요. '잘 논다. 내 눈에는 너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것 같은데, 지금도 네가 누군지 모른다면,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냐?'"(캐틀린 노리스, <<수도원 산책>>, 316쪽)

함께 공유해왔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있어 우리는 인생이라는 고해를 건너갈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이해관계로 얽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억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법궤'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저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억의 집합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는 그 속에 십계명 돌판과 만나,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지요? 그 속에는 돌판만이 들어있고 만나와 지팡이는 법궤 가까이에 놓아두었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가 그 세가지를 동시에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약백성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만나는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먹이시고 돌보시고 준비하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선택이라는 엄숙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일 겁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출애굽 공동체는 아론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각 지파별로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와서 지파를 대표하는 이의 이름을 쓰도록 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라."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보니까 아론의 지팡이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랍니다. 모세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는 그것을 증거궤 앞에 간직했습니다.

● 희망의 움을 돋게 하라
초대교회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십자가에 죽었다가 생명으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언젠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부활절 예배 광경을 보았는데, 그들은 강단 앞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메마른 장대 하나를 기대어 놓았더군요. 죽은 나뭇가지에 움이 돋기를 소망하는 거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이 세상에 희망의 움을 돋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어제 저녁 8시에 KBS T.V는 <선교 120주년, 한국 교회는 위기인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보수적인 교단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그에 앞서 KBS 앞에 몰려가 찬송가를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면서 마귀들과의 싸움에서 기어코 이기자고 다짐했다더군요. 저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참담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도 자기 반성을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공중파를 통해서 우리의 실상을 보도록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매를 들면 맞아야지요. 그리고 정신을 차려야지요. 변화는 자기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숨기고, 가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교회에 대한 찬가를 불러도 세상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리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한국 교회라는 메마른 가지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는 날이 언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몸 구실을 제대로 할 때일 겁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거룩한 성례를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의 지체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먹이로 내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런 뜻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고 소금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우리의 손과 발을 봉헌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가지에 움이 돋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 가지에 물을 주는 일은 우리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거룩한 성례를 통해서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4년 10월 03일 18시 17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