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2. 거룩함 앞에 설 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19:7-12
설교일시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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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 앞에 설 때
출19:7-12
(2004/10/17)

● 장엄함 앞에서
광야가 보고 싶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을 헤맸던 광야, 그 척박한 땅에 발을 딛고 싶었습니다. 광야에 나가보니 하나님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제 친구는 말했습니다.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가면서도 저는 잠이 들 수 없었습니다. 그 허허로운 광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광야는 학교입니다. 이따금 낙타를 타고 지나가는 베두인족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광야는 제게 쓸데없이 말하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광야는 우리 영혼을 갈고 닦아주며, 어떠한 나약함도 허용하지 않는 곳입니다. 광야는 또한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하찮은 일, 쓸데없는 일과 수다스러움을 버리게 만듭니다. 유감스럽게도 광야를 걷지 못했습니다. 차를 타고 지났을 뿐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광야를 걷고 싶습니다.

시나이 광야 한복판에 2285m의 시내산이 서있습니다. 우리는 새벽 1시 45분에 시내산 등정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낙타와 사람들이 뒤엉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홀로 그 산을 올랐던 모세의 고독을 가슴에 느껴볼 틈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맑고 투명한 달빛과 별빛이 울울한 심사를 씻어주었습니다. 정상에 이르러 예배를 드리고 일출을 기다렸습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동녘 하늘을 향해 고정되었습니다. 마침내 옅은 구름 사이로 해가 떠오르면서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인 산을 붉게 비출 때 그 장엄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차별을 지워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종도 피부색도 이념도 다 뛰어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장엄함이었습니다. 수 천년 전 모세도 그 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엄함 앞에서 자기의 작음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성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말씀 앞에 설 준비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 골짜기를 지나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의 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 앞에 장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불러 백성들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5-6)

모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하고 응답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반응을 하나님께 아뢰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계약을 맺기 위한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하십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첫째, 그들을 성결케 하고 옷을 빨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섬겨왔던 다른 신들을 모두 버리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마음을 정하고(決) 끊어야 할 것을 끊는(斷) 것입니다. 우리 삶이 누추함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유사-신들(pseudo-gods)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음식이 끊어지기까지는, 하늘의 만나가 내리지 않았음을 잘 압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파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이전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을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삶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둘째,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아무도 그 지경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4장 3절에 보면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데서 성립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당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성호를 그리면서 자신이 거룩한 경내로 들어왔음을 확인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두 손을 모으고 가볍게 절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참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성전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전이 되는 까닭은 하나님께 봉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구별된 장소에 들어왔음을 알아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신앙생활은 허구일 뿐입니다.

셋째,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그냥 기다림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입니다. 스스로를 성결케 하고, 옷을 빨고, 행동거지를 삼가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니다. 과연 이런 기다림이 있는지요?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요?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주일에도 쉬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교회에 나오지는 않습니까? '오늘과 내일'은 준비의 날이고, '제 삼일'은 만남의 날입니다. 오늘과 내일을 잘 살아야 제 삼일이 소중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 새로운 소명
저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동료 교역자들에게 우리가 궁극적으로 올라야 할 산은 '예수라는 산'이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산은 체력만 있으면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정신이라는 산을 오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죽어야 산다는 믿음 말입니다. 섬김과 돌봄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간 날은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호텔의 엘리베이터도 기계를 작동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을 위해 매 층마다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사진을 찍을 수도, 필기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카메라도 쉬어야 하고, 볼펜도 쉬어야 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전통적인 복장을 갖추고 통곡의 벽에 모여들어 앞뒤로 혹은 좌우로 몸을 흔들면서 토라를 읽고, 기도를 드리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보면서 저는 가슴이 선득해짐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의 뿌리를 보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떠오르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하신 탄식이었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2)

며칠 전 우리는 이스라엘 장교가 13살 먹은 팔레스타인 소녀를 죽이고, 확인사실까지 하였다는 소름끼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할 일입니까? 미움은 미움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폭력의 사슬을 끊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평화는 용서와 관용에서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이 그리고 미국인들이 예수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통곡의 벽 앞에 모여 진정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리고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면 중동지역이 지금처럼 화약고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탄식하며 울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예수의 길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예수라는 산에 올라가야 할 때입니다. 옛사람은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했으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스승을 찾아가 길을 물었다 합니다. 이미 스승을 얻었으면 곧 지팡이를 꺾어버리고 바랑을 높이 걸어두고 오랫동안 그를 가까이 하였다 합니다. 저는 이번 이스라엘 순례를 통해 예수야말로 인류가 선택해야 할 길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거룩함 앞에 서기 위해서는 모든 헛된 것들을 버리고, 마음을 성결케 하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고, 제 삼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은 바로 준비의 날입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결단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와 만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의 산에 들 때 우리는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열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0월 17일 15시 38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