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3. 미쁘신 주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딤후2:8-15
설교일시 2004/10/24
오디오파일 S041024.MP3 [654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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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쁘신 주님
딤후2:8-15
(2004/10/24)

●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
경복궁의 경회루 앞 연못가에는 간신히 살아있는 것 같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김용해 집사님께 전해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둥치가 크지 않은데도 이미 옆으로 넘어져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넘어진 그 자리에서 가지 하나가 뻗어 나와 봄이면 어김없이 푸른 잎을 피워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집사님의 마음을 건드린 것은 그 초라한 나무를 베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기어코 살려내려는 정원사의 마음입니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정원사는 어쩐지 좋은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한 일을 보면 된다고 하지요? 어떤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꼼꼼하게 실행하는 이도 있고, 성기게 계획을 세우고 시절의 흐름에 따라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요.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서 남이 손을 다시 대지 않아도 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가림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일꾼입니다. 우리의 삶터가 어디이든 그곳은 주님의 일을 하는 일터인 것입니다. 새벽에 조용히 묵상하다가 문득 우리 성도들의 일상의 삶을 머리에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직장과 가게에서, 그리고 가정과 학교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려 애썼습니다. 과연 그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의식하고 있을까? 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아실 겁니다.

● 참 인간, 참 하나님
이집트인들은 대개 이슬람을 신봉합니다. 드물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콥틱 기독교인들인데,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공직에 나갈 수도 없고, 대기업에 취직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이집트에 있는 콥틱 교도들은 개종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모두 몸에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믿음은 뜨겁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지요? 성도들에게 세상은 온갖 유혹이 밀려오는 광야입니다. 그 광야에서 우리는 물질의 유혹, 명예의 유혹, 권세의 유혹, 쾌락의 유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물리칠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런 유혹을 물리쳐야 비로소 우리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기억의 성사입니다. 무엇에 대한 기억입니까? 그것은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입니다. 오늘 본문은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할 성도들에게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굳이 예수님을 다윗의 씨로 표현한 것은 그분의 고귀한 혈통을 말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분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인간임을 상기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유혹을 주님도 고스란히 경험하셨습니다.

고통과 유혹의 덫을 통과해가면서도 주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세상은 그런 주님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주님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참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자기에 대해 죽은 사람을 어떻게 다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말은 그분의 생명이 이미 불멸임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신비를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지금 갇혀 있습니다. 늙은 나이에 수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격절감도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어떤 종류의 자기 연민이나 자기 학대적인 경향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기의 처지를 낭만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우울하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사람은 밥을 먹고살지만, 그것만으로 삶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삽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보람있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의 반복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자기의 존재이유를 발현하며 삽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자기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비교적 명랑하게 현재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자신은 매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들레 홀씨는 길섶에 떨어지든 담 위에 떨어지든, 바위 위에 떨어지든 조금의 흙과 물기만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어납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은 어디서든 사건을 일으킵니다. 선포된 말씀도 허망하게 스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시편 147편 15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말씀은 들불처럼 번져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4절은 초대교회의 활기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말씀은 스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확신이 있기에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해 오래 참습니다. 그 참음은 소망이 있는 참음이기에 억지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겪는 고통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부활의 빛 가운데서 바라보는 것이 믿는 이의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 미쁘신 주님
어떤 경우에도 늘 당당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야?" 물론 큰소리치는 사람 치고 내적으로 여문 사람 드문 법입니다만, 기독교인들이 잔뜩 움츠린 채 살면 안 됩니다. 허풍이나 떨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을 믿고 산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확실해 보여도 우리의 믿음도 약화되고, 의지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닭살 커플이었던 이들이 어느 날 도끼눈을 하고 서로를 노려보는 일을 우리는 심심찮게 봅니다. 성도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3). 하나님이 우리처럼 변덕스러운 분이시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우리들이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11-12)

죽어야 삽니다. 그러나 주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입니다. 말로는 바쳤다고 하면서도 누군가 '자아'를 건드리면 펄펄 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을 위해 자기를 바친 사람들이 아니라, 바친 척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를 영(零, zero)에 가깝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를 영으로 만든 사람이 쉽게 화를 내겠습니까? 자기의 주장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려고 하겠습니까? 두려움에 떨겠습니까? 사소한 이익을 위해 거짓을 추종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어야 삽니다.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우리는 아직 주님의 길에 확고히 접어들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복잡한 일상 속에서도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옳게 분별하고 살아갑니다. 참과 거짓의 싸움터인 세상에서 그는 단호히 참의 편에 섭니다.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 이것이 그의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삶으로 진리를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그가 있음이 세상의 복입니다. 그들은 때로 한 조직에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 죽어 가는 나무일망정 뽑아버리지 않고 물을 주어 가꾸는 정원사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가꾸고 계십니다. 미쁘신 주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을 든든히 붙잡고 세상에 하늘의 생명을 가져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0월 24일 17시 56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