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4.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암5:4-6, 14-15
설교일시 200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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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고 있는가?
암5:4-6, 14-15
(2004/10/31, 종교개혁기념주일)

●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이것은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 나온 한비야 씨의 칼럼 제목입니다. 가슴 뛰는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아직 젊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매사가 덤덤해지는 것이라지요? 한비야 씨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야말로 가장 자기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를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설명하다가 동아프리카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 근처에 있는 월드비전의 구호캠프에서 경험한 일을 들려줍니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은 오랜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식량과 물을 공급하는 일과 이동 안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풍토병과 악성 안질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동 병원에 40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통령도 만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인데, 그런 깡촌까지 내려가 전염병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한비야 씨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이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나요?"
그러자 그는 어금니가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죠."

이게 바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서 힘없는 이들을 위해 살고, 세상의 불공평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비야 씨는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권력 투쟁과 이권다툼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교권에 맞서 참 소리를 내다가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보름스 의회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라는 명을 듣습니다. 1521년 4월 17일 루터는 황제와 여러 제후들 그리고 청문회 의원들로부터 세 번에 걸쳐 심문을 받았습니다. 심문자인 에크(Johann Eck von Trier)는 루터의 책들을 모아놓고 그것들이 모두 루터 자신의 책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것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를 묻습니다. 루터는 망설였고, 황제는 그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었습니다. 어쩌면 그 하루는 그의 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루터는 보름스 청문회에 나와 자기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pe mir! Amen).

그는 나약한 지식인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고통의 자리를 향해 발을 내딛습니다. 그것이 그의 양심의 명령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두고 "주님의 포도원에 침입한 멧돼지 한 마리"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루터의 공적도 있고, 그로부터 비롯된 문제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전을 위해서 자기 양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무모해 보이는 그의 열정을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루터가 있었기에 카톨릭 교회도 스스로를 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은 도구화 될 수 없다
여기 가슴이 뛰게 하는 일에 몸을 바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 번성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부름 받은 사람, 아모스입니다. 그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그 시대에 파멸의 메시지를 들고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그는 왕과 고위층들에게,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외칩니다. 찾으라는 말은 그들의 정신이 딴 데 팔려있음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숨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십니다. 하지만 돈과 향락과 권력에 취한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모스 시대의 종교는 매우 번성했습니다. 성소마다 제사를 바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곳곳마다 찬양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십니까? 휘황한 종교적 열정 자체가 우리 눈을 가려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종교의 본령은 사람들을 깨우는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종교는 사람들에게 자장가를 불러 그들의 잠을 더욱 혼곤하게 만듭니다. 마르크스는 그런 타락한 종교를 가리켜 '아편'이라 했습니다. 니체는 그런 종교를 가리켜 '노예의 종교'라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바치는 행위가 이미 하나님을 찾는 행위인데 아모스는 "너희는 나를 찾으라"고 외칩니다. 벧엘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랍니다. 길갈은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그분의 뜻을 받드는 행위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욕심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속이거나, 우리 사는 꼴을 보고 화가 나신 하나님을 달래는 모임이 아닙니다. 예배는 자기 부정의 자리입니다. 진실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과 생각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예배는 가짜입니다. 벧엘로 길갈로 달려가는 이들이나 시청 앞으로 달려가 '주님'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이들이나 다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도구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견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는 것처럼 큰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철저히 비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가슴을 치실 것입니다. 불편하지만 우리는 아모스의 예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6) 가장 거룩해야 할 성소가 심판이 시작되는 곳이요, 가장 철저하게 진행되는 곳이 됩니다.

하나님이 성소들을 치시겠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절이 그 대답입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힘이 있다고 불의에 가담하고, 정의를 짓밟는 자들이 바치는 제사를 하나님은 역겹게 여기십니다. 그런 제사와 예배야말로 사람들을 망하게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독선과 아집의 성채를 벗어나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14)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15)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공의를 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예배선택권을 보장하라며 단식투쟁을 했던 강의석군을 기억하시지요? 저는 그 학생에게도 눈길이 갔지만 대광고등학교 교목이었던 류상태 목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면서 강의석군을 지지했는데, 그것이 학교재단에 해를 입혔다 하여 학교로부터는 경고장을 받고, 그가 속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으로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사직과 목사직을 반납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 자리에 가게 했습니까? 그는 학생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학교와 재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인류 사랑의 정신이 그토록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물음 앞에 서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독선과 아집의 성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피부색이나 민족, 종교의 벽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벧엘로, 길갈로 가는 것으로 우리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사랑이고 섬김이고 관용입니다. 지금 교회의 선교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가 걸으셨던 길을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사람, 이 시대는 그런 이를 부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인 오늘, 우리 모두 사랑과 이해와 관용과 섬김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0월 31일 16시 06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