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6. 언약갱신
설교자 김기석
본문 수24:14-21
설교일시 200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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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갱신
수24:14-21
(2004/11/14)

● 전환점이 되는 순간
몇 주 전 우리는 임 영 집사와 정경례 집사가 결혼 22년만에 전통혼례식으로 혼례식을 다시 한번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 집사님께 그래서 신혼 기분이냐고 물으니까, 깔깔 웃다가 "아무래도 새롭죠" 하고 대답하더군요. 첫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린 분들은 한번쯤 생각해보심직한 일인 것 같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인들에게 계약 예배(Covenant Service)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도록 초청을 받은 성도들은, 거룩한 마음과 거룩한 생활로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섬기며 살겠다는 작정의 표로 하나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는 아주 소중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나 한 공동체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 말입니다. 과거를 과거로 매듭짓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발돋움하는 계기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인 길갈에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할례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앞 세대의 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고, 애굽에서 겪었던 수치를 제거한다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리고를 목전에 두고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수5:2-12).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절차였던 셈입니다.

또 생각나는 것은 미스바 대집회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정신적 중추가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떠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긴지 이십년이 지난 후 사무엘은 온 백성들을 미스바에 불러모은 후에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7:3) 그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금식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해서 재건 사업에 박차를 가할 때 그들은 매우 중요한 집회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재건 사업에 지친 이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해달라고 말합니다. 에스라는 율법 책을 읽었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다 울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느8:10)이라고 백성들을 달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거룩한 백성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늘 본문도 앞에서 살펴본 모임과 비견될 만큼 중요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출애굽의 여정을 완수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각 지파는 자기에게 분배된 땅에서 살아갈 것이지만, 과연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가 문제였습니다. 당장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지파 중심주의가 생겨날 것은 정한 이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세겜에 각 지파의 두령급들을 불러모으고, 그들 앞에서 지나온 날들을 회고합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전장에서 한 평생을 보낸 노병의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들이 평안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지키셨고, 또 어떻게 승리를 거두도록 도우셨는지를 말하면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을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못을 박듯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4-15)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정신에 혼을 불어넣기 위해 이런 도발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무뎌지게 마련입니다. 고통 속에서는 하나님을 절박하게 찾지만, 평안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맙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지금 팔루자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보면서도 우리는 예리한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여성들과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의 공포에 질린 눈과 그들의 잘린 몸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믿을 때는 예수 정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신앙이란 결단입니다. 날마다 삶의 전장에서 우리는 결단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 다지고 또 다지는 믿음
우리는 물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모든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사안 사안에 따라 그리스도인답게 결단해 나가야 우리 믿음이 자랍니다. 도법 스님은 궁극적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별해탈(別解脫)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별해탈이란 삶의 순간마다 얻는 해탈의 경험을 말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해야 합니다. 승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양의 축적 없이는 질적인 도약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의 현장이야말로 우리가 기독교인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행복과 편리와 쾌락의 길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섬김과 나눔과 돌봄의 길을 가리킵니다. 우상의 길은 넓은 길이고, 하나님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몇 해 전 우리는 태백의 황재형 화백이 만든 바보 예수 십자가를 구입했습니다. '바보 예수'라는 말은 예수를 모욕하기 위한 표현이 아닌 줄은 다 아시지요? 그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입니다. 하지만 그 바보 예수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바보 소리를 듣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겁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여호수아의 도전 앞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회상하면서 확고한 어조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딴죽걸기처럼 보이지요? 믿겠다는 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여호수아는 신앙이란 전 인격의 투입을 요구하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절반의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그들은 주일이면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성경도 읽고, 찬송 부르는 것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옛 자아에 매어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외면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바라봅니다. 주님은 진정한 믿음이 자아의 부정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이런 처지를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일 겁니다.


● 우답불파의 신앙
저는 최근에 정수일 선생의 글을 읽다가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소중한 지침이 될 두 마디의 말과 만났습니다. 牛步千里와 牛踏不破가 그것입니다. 살아가는 데는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겠다는 매진정신과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게 다지고 또 다지며 살겠다는 반석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은 과정입니다. 조금씩이라도 성장해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역경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든든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 게 장난이 아니라는 여호수아의 도발 앞에서 백성들은 일제히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그 약속을 받은 후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언약을 새롭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지파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 다짐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일백 십세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죽은 후의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24:31)

이 구절은 그 뒤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우리의 결심은 흐릿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일상의 매순간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택할지 우상을 택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여호와를 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 눈물이 생명의 씨앗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빛과 길로 삼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꾸준히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2월 12일 16시 30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