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8. 회복의 꿈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63:15-19
설교일시 200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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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꿈
사63:15-19
(2004/11/28)

●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빈곤과 주택난, 그리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에 입힌 상처와 그에 따른 허무주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른 여덟 살의 캐테는 세 아이를 데리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편인 프레드는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자기의 무능력 때문에 그들이 상처 입는 것이 싫어서 가출했습니다. 이 가엾은 부부는 한 달에 한번씩 더러운 여인숙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캐테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고 탄식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합니다. 가난과 생의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남편의 늙은 얼굴을 보며 캐테는 말합니다. "당신은 기도를 해야 해요. 정말 그래야 해요. 기도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걸 당신은 왜 외면하는 거예요?" 남편은 맥없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날 위해 기도해 줘. 나는 기도하는 법을 잃어버렸어." 아내는 다급하게 말합니다. "연습이 필요해요. 끈질기게 해야 해요. 계속해서 다시 시작해 봐요. 술 마시는 건 소용없어요." 남편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말합니다. "취하면 어떤 때 기도가 아주 잘 돼." 캐테는 안타깝습니다. "그건 소용없어요, 프레드. 기도는 정신이 맑은 사람이 하는 거예요."

삶이 힘겨워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조차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아 암담할 때가 있습니다. 나 홀로 섬처럼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꿈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데, 꿈조차 빼앗긴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세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낯선 땅의 영원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하늘은 무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합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15)

조상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그들을 찾아오시어 출애굽의 대업을 이루신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그 하나님, 우렛소리와 우박으로 적들을 물리치신 그 하나님의 기세가 지금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왜 침묵하십니까? 우리에 대한 사랑이 이제는 식어버린 것입니까?" 그들이 마음에 그리고 있는 하나님은 어쩌면 들라크르와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에 표현된 자유의 여신과 같은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삼색기(청·백·홍―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를 들고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결연한 의지로 사람들을 자유에로 이끄는 존재 말입니다.

● 역설적 희망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너무나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19)

이것은 분명 비극적 상황입니다. 어린 물고기 한 마리가 어른 물고기들로부터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어린 물고기는 어떻게든 그 '바다'를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다에 이를 수 있어요?" 그러자 어른 물고기들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가 있는 곳이 바다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겪는 삶의 곤고함과 괴로움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빛을 앗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서 한 걸음이라도 그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옛 생활의 습관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여 돌아오시옵소서.(17)

적반하장처럼 들립니다. 주의 길을 떠난 것은 우리이고, 마음을 강퍅케 한 것도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런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역설적인 외침이 아닐까요? 그들은 고통을 맛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치 않은 자기들의 삶이 비극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삶의 가장 큰 전락은 가난도 아니고, 질병의 고통도 아니고, 명예를 잃거나, 어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외심을 잃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전락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비극적인 처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제멋대로 사는 것, 저는 이게 바로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심판관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제멋대로 삶으로써 자기 자신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남성들은 예배를 드릴 때 '키파'라는 모자를 씁니다. 그것은 자기들 머리 위에 존귀하신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 모자는 제 멋대로 살지 않는다는 일종의 다짐인 것입니다.

● 주는 우리 아버지
자신이 빗나간 자리에 있음을 절감하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16)

이 고백이 참 소중합니다. 우리는 아버지 아닌 존재를 따라나선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화여고의 이종용 목사님은 자신의 피난시절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많은 사람 틈바구니에서 걷다가 문득 바라보니 자신이 다른 이의 손을 붙잡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 아버지가 아닙니다. 권세도 출세도 쾌락도 우리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가짜 아버지'입니다. 그 가짜 아버지들은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만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 손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 불편한 분들이 계신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이 말씀처럼 힘이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밥상을 차려주시고, 숟가락도 주시지만 밥을 떠 먹여 주지는 않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울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면제시켜 주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우리를 부르시고, 동행하시고, 말없이 일으켜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원히 미성숙의 상태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 영혼의 회복기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의 길 위에서 때로는 비틀거리고 때로는 곁길로 빠지기도 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그도 하나님 안에 머물면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을 나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변화되어 주님의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생의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미국의 원주민 한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내적 싸움에 대해 말했습니다. "내 안에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고 악합니다. 다른 개는 착합니다. 그 어리석은 개는 늘 착한 개에게 싸움을 걸지요." 그 싸움에서 주로 어느 쪽이 이기냐고 물으니까, 그는 잠시 숙고한 후에 대답했습니다. "내가 잘 먹이는 개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입니다. 어느 쪽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느냐가 우리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이 절기는 가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지쳤던 우리 영혼의 회복기(回復期)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절기에 우리 영혼의 안테나가 하늘을 향해 바로 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2월 12일 16시 34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