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9. 키를 드신 메시아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3:1-12
설교일시 2004/12/5
오디오파일 s041205.mp3 [563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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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를 드신 메시아
마3:1-12
(2004/12/5)

● 선구자
대강절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척박한 유대 광야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던 그가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봇물이 터지듯, 비둘기가 일제히 날아오르듯 그의 말은 억눌렸던 자의 함성(訥喊)이 되어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그는 사람이 많은 도시를 찾아가지 않았지만, 들큼한 일상에 젖어 살던 많은 이들이 그 소리를 따라 광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구하면서도 참을 구합니다. 우리 육신은 평안을 취하는 게 잘사는 거라고 속삭이지만, 영혼은 뭔가 다른 세계에 끌리게 마련입니다. 요한을 찾아 광야로 나간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광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미드바midbar'가 '말씀'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들큼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혼은 아무리 타락했더라도 진정한 하늘의 소리를 들으면 깨어나는 법이랍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어둠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 하늘의 소리와 만나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말굽쇠(tuning fork)를 두들기고 나서 다른 말굽쇠 가까이 가져가면 두 번째 말굽쇠도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동조 또는 공진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자기의 한계를 깨고 나를 열어 하늘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역시 그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맑은 소리, 하늘의 소리는 어떤 이에게서 납니까?

성경은 세례자 요한이 몸에는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전합니다. 보양식을 좋아하는 이들은 요한이 좋은 것을 먹고 살았다고 부러워하더군요. 하지만 성경이 굳이 그의 음식과 복장을 언급하고 있는 까닭은 그의 청빈한 삶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겁니다. 제가 거듭 강조하는 바입니다만 마음의 청결은 청빈한 삶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청빈한 삶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도 지당한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인격과 진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말씀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요한의 소리에 공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베푼 세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세례의식은 유대인들에게 낯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몸을 닦는 정결예식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문의례(initiation)로서의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될 때만 시행되어 왔습니다. 과거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징표로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유대인들은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며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봤을 겁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 입문의식으로서의 세례를 이방인들이 아닌 유대인 일반에게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보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 잘못된 안정성을 깨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그의 앞에 나왔습니다. 그들이 나온 것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염탐하기 위해서일까요?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전 체제를 유지하는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그들을 향해 던진 세례자 요한의 도발적인 말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가장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장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향해 세례자 요한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요? 요한의 말은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요?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점잖게, 세련되게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때로는 미풍보다는 태풍이 어떤 정신이 깨어나게 합니다. 그는 곧장 문제의 본질에 다가섭니다. 그들의 영혼을 가둬둔 허위의식의 가면을 말씀의 도리깨질로 과감하게 깨뜨립니다.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 소리 앞에 넙죽 엎드린 사람은 영혼의 자유를 맛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소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더욱 자기의 노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럴 수 있는 것은 천지에 사무치고 있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이 정도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 이 정도면 잘 믿는 거지, 이 정도면 할만큼 한 셈이지, 하는 잘못된 안정감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거룩하고 신실하고 헌신적이기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은 자전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달려갈 길 다 갈 때까지 우리는 우리 영혼의 진보를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가끔 우리가 너무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소홀히 하고, 덜 중요한 것에 마치 목숨이라도 걸 듯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광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황량해서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자신의 작음을 절감할 수 있는 그곳에 서면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들사람인 세례자 요한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 키를 든 메시야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은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위대함은 자기의 한계를 분명히 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잘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아침해가 떠오르면 등잔불을 끄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 앞에서 물러서고 있습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자기 낮춤이 우리에게는 다소 낯섭니다.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라(過恭非禮) 했습니다. 상대가 가진 힘 때문에 그 앞에서 굽신거리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렇지만 어떤 힘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는 들사람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말하는 데도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는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 거짓된 안정성을 깨뜨리는 쇠도리깨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깨진 오지 항아리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새롭게 빚어내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리며 백성들과 한 몸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공생애의 초기에 광야에 들어가 40일 동안 기도하셨고, 또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고요한 곳을 향해 기도하셨지만,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사람들 한 복판입니다. 욕망의 시큰한 냄새가 나고, 비열한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고, 희노애락의 온갖 감정들이 시시때때로 갈마드는 세상 한 복판, 바로 그곳이 예수님의 마음이 머문 곳입니다. 그 진흙탕같은 그곳에서 예수님은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셨고, 또 그들을 하늘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자도 위대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온 몸으로 구현하며 사는 사람들은 더욱 위대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한껏 낮춤으로써 예수님을 높이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자기를 일컬을 때 고(孤), 과(寡), 불곡(不穀)이라 했습니다. 자신을 덕이 없고 알이 들지 못한 곡식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못돼 먹어서 힘이 숭상될 때 임금은 자신을 짐(朕)이라 했습니다. 옅은 여울물이 소리가 높습니다. 저는 이 교만의 세월에 세례자 요한을 그리워합니다. 자기를 낮춤으로 남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이 대강절기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감히 그분의 신을 들 수도 없다고 말했던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의 임금으로 오시는 주님의 손에 '키'가 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쭉정이에 불과한 것에 집착하느라,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라도 주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맞아들이십시오. 자신의 참상을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주님의 혼과 만나 우리의 영혼의 심지에도 하늘의 불꽃이 타올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이 다시 한번 우리의 지친 삶을 일으켜 세우는 삶의 묘약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2월 12일 16시 35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