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0. 말씀 등불 밝히고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18:25-30
설교일시 200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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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등불 밝히고
시18:25-30
(2004/12/12, 성서주일)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이면서 성서주일입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입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가장 많은 출판 부수를 기록한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가요? 사람들은 그 귀한 말씀을 잘 보존하려고 가방 속에 혹은 책꽂이에 잘 꽂아둡니다. 해가 지나도 깨끗한 성경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성경을 읽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읽어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 재능보다는 꾸준함이 낫다
황상은 열 다섯 살 나던 해인 1802년 10월에 다산 정약용 선생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당시 다산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강진으로 귀양 가 있었습니다. 황상은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주막집을 찾아가 발치에 앉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글을 배웠습니다. 그 때의 만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레 째 되는 날 다산이 황상에게 문사(文史) 공부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한 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사람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기에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제목만 주면 글을 쉽게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한 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습니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자신이 둔한 줄 알기에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크게 이루게 마련입니다. 끝이 둔한 송곳으로 구멍을 뚫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습니다). 천착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가?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정민, 『미쳐야 미친다』, 182-3쪽)

● 삶의 날실
이게 학문의 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당장에는 깨달음이 없더라도 꾸준히 읽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 삶을 조율해나가는 사람은 때가 되면 자기 앞에 활짝 열린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삶의 명인처럼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뭉특하지만 말씀을 붙들고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태산같은 든든함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삶에 지침이 될만한 경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럴 목적이라면 명심보감을 보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내용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성경은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킵니다. 그렇기에 자기 스스로 만족에 겨워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위로부터의 간섭이 싫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삶을 어떻게 성화시킬 것인가를 묻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억울한 이의 비명이 있습니다. 또 가장 힘겨운 처지에 빠진 사람이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있습니다. 인간의 비열함과 음모가 빚어낸 악의 현실이 있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우리 속에 용기가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성경이라 할 때 '經'은 '도리, 법도, 날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날실은 피륙을 짤 때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와 바탕받침에 미리 둘러 친 실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실을 끼워 넣은 후 바디로 내리치면 씨줄이 한 줄씩 짜이게 되는 것이지요. 언제나 중심은 날실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날줄이 팽팽해야 그것을 바탕으로 삶이 실하게 구성되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 삶이 욕망을 따라 흘러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소중한 버팀목인 것입니다.

● 하나님, 움직이는 거울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완전한 자에게는 완전함을 보이시고, 깨끗한 사람에게는 깨끗함을 보이시고, 간교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는 분입니다(25-26). 한 마디로 하나님은 거울과 같으십니다. 거울에 비친 상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거울에 비추어보듯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직면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움직이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꾸짖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시인은 이것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27).

성경 어디를 보아도 우리는 인간이 빚어낸 온갖 모순과 무질서를 바로잡아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마음이 교만해진 자는 낮추시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은 붙들어 일으켜주십니다. 지친 사람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7세기에 살았던 시나이의 수도자 요한 클리마쿠스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악마의 발명품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이다. 그것은 비난의 어머니이고 칭찬의 자식이며 불모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광기의 선구자이며 몰락의 창조자이다. 마귀에 들리는 원인이고 분노의 원천이며 위선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악마의 요새, 죄의 후견인, 냉혹함의 근원이다. 연민의 부정이요, 지독한 위선자요, 무자비한 심판관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신성을 모독하는 뿌리이다."

하나님이 교만을 미워하시는 까닭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너져야 인간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교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셔야 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우리가 알아보아야 합니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28).

하나님이 우리 등불을 켜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옵니다. 읽지 않고 듣지 않는 사람이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코치들은 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동작을 반복하도록 합니다. 그 동작을 반복하면서 그들은 서서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요동치는 버릇이 든 물은 바다에 이르러야 고요해지듯이, 우리 삶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면 삶의 기본을 가르쳐주는 성경으로 거듭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말씀은 어두운 데를 밝히는 등불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그 길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반신 장애자인 유진서 씨는 누구와 대화를 할 때마다 음식을 받아먹듯이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해주신 말씀의 씨앗을 잘 키워서 여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말씀과 만나면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주일날 설교를 통해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은혜 받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함을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따라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精美"(30)하다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2004년 12월 12일 16시 37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