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1. 케노시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빌2:5-11
설교일시 2004/12/19
오디오파일 s041219.mp3 [6159 KBytes]
목록

케노시스
빌2:5-11
(2004/12/19)

● 내 안에 너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본문 5절의 이 말씀은 아주 멋진 번역입니다. 바울의 의중을 이 말보다 더 잘 번역할 언어는 없을 것입니다. '품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품 속에 넣거나 가슴에 대어 안거나 몸에 지니다>. <원한·슬픔·기쁨·생각 등을 마음 속에 가지다>. 그러니까 '품는다'는 말은 뭔가를 안으로 모셔들여 간직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품고 계십니까? 품에 무엇을 안느냐가 그 사람의 생의 내용을 결정하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말일 겁니다.

한동안 '내 안에 너 있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T.V 드라마에 나온 비련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한 말입니다. 참 절절한 사랑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이별의 시간에도 함께 있습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남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 만해 한용운의 시구도 결국은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게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요 음성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 마음에 이처럼 늘 거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분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고백은 거짓이거나 습관일 겁니다.

물론 사랑의 시작은 의지나 결심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서 운명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절로 '되는 사랑'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곧 실망하게 됩니다. 사랑이 깊어지려면 '하는 사랑'으로 이행되어야 합니다.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서 내공이 깊어지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하게 되는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마음은 기뻤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주님 만날 설렘에 가슴이 벅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주님 앞에 나오고, 습관적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이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 열린 마음
주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장 1-4절이 그 지침입니다. 특히 3절과 4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늘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이 낫다고 여겨야 합니다. 이 말은 늘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말일 겁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속담은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배우기보다는 가르치려 들기 일쑤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들에게서 인격의 향내를 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도 책임 있게 잘 감당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일도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짧지만 아주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담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을/를 위한'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이 말 속에는 도덕적·정신적 우월의식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와 더불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협력이 없다면, 그가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의 어떤 노력도 결실을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God-is-with-us)이시지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is-for-us)이 아닙니다.

또 '타자'라는 말도 마음에 걸립니다. '타자'는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자'라는 차가운 말 대신에 '이웃'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그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케노시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요약하자면 '자기 부정' 혹은 '자기 초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6-7)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움을 가리켜 '케노시스'(kenosis, '비우다'를 뜻하는 에서 유래)라 합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고 다짐합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말구유에 오셨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성탄절기가 되면 많은 교회에서 말구유를 만들어놓습니다만 말구유는 단순한 추억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를 뜻합니다. 주님이 그 낮은 곳에 임하신 까닭은, 세속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하늘의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4장은 도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좌기예(挫其銳)하여 해기분(解其紛)하고, 화기광(和其光)하여 동기진(同其塵)한다". 도는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여 엉클어진 것을 풀고, 그 빛을 감추어 먼지와 하나로 된다는 뜻입니다. 좌기예란 날카롭고 뾰족한 것을 좀 무디게 한다는 말입니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가르고 쪼개고 찌르는 것 아닌가요? 결국 가르고 쪼개면서 네편 내편을 나누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거지요. 그렇게 해야 해기분, 곧 어지럽게 엉클어진 것들이 풀린다는 말입니다. 화기광하여 동기진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빛을 짐짓 감추고[和其光] 먼지와 하나로 된다[同其塵]는 뜻입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티끌처럼 존재가 작아 보이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그들도 지으셨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힘이 없다 하여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값이 다르게 매겨지는 오늘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라크에서 미군 천 여명이 죽었다고 합니다만, 그것보다 수 십 배, 수 백 배 죽거나 다친 이라크인들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무감각합니다. 타인의 고통이어서 그런가요?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이들, 티끌 같은 이들과 하나되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빛을 감추신 채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울고 웃으며 한 세상 사셨습니다. 그런 삶의 결과가 십자가였습니다.

●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
하지만 십자가는 만사휴의萬事休矣('더 손쓸 수단도 없고 모든 것이 끝장났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땅의 길이 끝난 곳에서 하늘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자기 비움의 끝은 비참 혹은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들려 올려짐의 시작입니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몸을 낮출 때 하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옵니다. 잘난 사람들의 눈에는 주님이 티끌처럼 보였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를 가장 귀히 여기셨습니다.

<역도산>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역도산 역을 맡은 배우 설경구씨는 그 역을 해내기 위해서 20킬로그램 이상 체중을 불렸답니다. 그리고 촬영을 하는 동안 그는 '설경구'가 아니라 '역도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프로정신을 높이 삽니다. 철저한 배우라는 겁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을 닮기 위해, 아니, 그분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 영적인 게으름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이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항상 누군가에게 배우려는 열린 마음으로 살고, 이웃들의 일을 기꺼이 돌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John Wesley 목사가 1750년에 쓴 시구를 읽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Do all the good you can)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By all the means you can)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In all the ways you can)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In all the places you can)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때에(At all the times you can)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To all the people you can)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As long as ever you can).

등 록 날 짜 2004년 12월 19일 15시 06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