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2. 나사렛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2:13-23
설교일시 2004/12/26
오디오파일 s041226.mp3 [698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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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
마2:13-23
(2004/12/26)

● 치통과 해석
성탄절 다음 날인데도 세상은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여전히 배고프고, 피곤한 사람은 여전히 피곤합니다. 별을 보고 예수께 나왔던 동방박사도 보이지 않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가 들었던 천군 천사들의 노래도 들리지 않습니다. 꽃다발도 축하의 인사도 없습니다. 낯선 땅에서 아기를 낳은 부부의 대책 없는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시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습니다. 서러움에 울 새도 없습니다. 성 가족은 마리아가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과묵하지만 진실한 요셉은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급히 애굽으로 피난하라는 천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와 산후조리도 하지 못한 여인이 광야를 거쳐 애굽으로 피난길에 오릅니다. 건장한 사내들도 걷기 어려운 그 길을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몸으로 걸어갑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 햇빛 한 점 가릴 데 없는 그 뜨겁고 팍팍한 길을 가는 겁니다. 기다리는 이도, 반겨줄 이도 없는 곳으로 말입니다.

성경은 성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 사정과 돌아온 사정을 건조하게 말할 뿐, 그 과정에서 그 가족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눈물겨운 일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 가족의 애굽 피신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구를 인용함으로써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입증하려는 진리 확증 방식(dicta probantia)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Verheissung)이 성취(Erfuellung)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계약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과 성취의 도식으로 성 가족의 애굽행을 설명하면 그 가족이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삶이 제거되고 맙니다. 그것은 마치 밤새 치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고통이라는 것은 사실은 텅 빈 것(幻)이라고 훈계조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야 했던 가슴 시린 고생은 예수님 개인의 고통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으로의 피신 이야기는 긴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사를 압축해 놓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우리네 삶 전체가 어쩌면 그런 고난의 연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 전체로 감내해야 했던 고난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시험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었습니다(히2:18). 우리는 누군가와 의견이 엇갈리거나 이해관계로 얽혔을 때 "댁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합니다만,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입장의 동일함이 전제되지 않은 이해란 없습니다. 주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비천한 자들과 사귀라(롬12:16)고 한 것은 그들의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는 구원의 기쁨과 신비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 우리 속에 있는 헤롯
주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신한 후에 베들레헴에서 벌어진 사건을 우리는 잘 압니다. 헤롯은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을 그렸습니다. 아기를 빼앗기고 울부짖는 여인들, 넋이 빠져버린 여인들, 그리고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아기들, 아기들의 여린 살에 칼을 들이대는 군인들의 몸짓을 보노라면, 아 이게 인간의 역사구나 하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됩니다. 하려고만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는 게 사람입니다.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땅에 묻힌 라헬의 통곡소리를 듣습니다.

설마 이런 일이 정말 있었으랴 싶기도 하지만 헤롯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권력욕과 의심의 화신인 그는 자기의 권좌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자기 아내와 아들과 장인까지도 서슴없이 죽였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 깊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했던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동방박사들로부터 전해들은 그는 광분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무고한 아기들의 살해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서도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서의 보도를 통해 그 당시의 사람들이 헤롯에 대해 느꼈을 공포와 혐오감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은 인간이 미개했던 시절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요? 형태는 다르지만 이 일은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12월 18일 대구에 사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의 네 살배기 아기가 죽었습니다. 굶어죽었다고도 하고, 불치병으로 죽었다고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 아이의 죽음을 보면서 제 귀에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어쩌면 너무 느닷없는 비약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귀한 생명의 덧없는 스러짐을 세상 도처에서 다반사로 벌어지는 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아기의 죽음은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입니다. 아니, 나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기소장입니다. 내 배고픈 줄은 알면서 남의 배고픈 사정은 모르고, 내 자식 귀한 줄은 알면서 남의 자식 귀한 줄은 모르는 세상, 귀중한 생명을 사랑으로 보듬어 안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헤롯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전도된 세상을 일시에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없습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앞서 걷기 시작하면 그 발자국을 따라 오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아버지는 새벽 3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셔서 넉가래를 들고 눈밭 위에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은 3킬로미터쯤 떨어진 교회당을 향했습니다. 당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른 새벽에 교회를 향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그 길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이웃들을 사랑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풀섶의 이슬 내린 길을 걸을 때 맨 앞에 서서 가는 사람을 가리켜 이슬떨이 혹은 이슬받이라고 한답니다. 성도는 그런 사람입니다. 차가운 눈 속에 발을 딛고 서서 길을 내는 사람, 바짓단을 다 적시면서 앞서 걷는 사람 말입니다. 영웅적인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심스러우나 꾸준히 하늘의 길을 걷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 나사렛 사람의 뒤를 따라
성경은 성 가족의 애굽생활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 눈물겨웠을 삶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배려일 겁니다. 다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헤롯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말했다는 단순한 사실만 전해줍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요셉은 그 말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켈라오도 역시 포악한 사람이었던지라, 요셉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정착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Naz raios)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복음서의 첫 장면에서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까닭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언어 분석을 자세히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나사렛은 히브리어로 '줄기, 가지'를 뜻하는 '네체르netzer'와 발음이 유사합니다. 또 '지키다, 준수하다'는 뜻의 '나사르n sar'와도 유사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히브리어의 두 가지 의미를 연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는 이사야 11장 1절에 나오는 이새의 '줄기'이고, 다른 하나는 민수기 6장에 언급되고 있는 나실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 할 때 사람들은 그분을 이사야를 통해 약속되었던 메시아를, 그리고 나실인처럼 성별된 존재를 연상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나사렛이라는 보잘 것 없는 시골 마을에 칩거하고 있습니다. 대지에 쌓인 눈이 땅에 떨어진 씨앗들을 보호하듯이, 나사렛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미처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조급하기만 한 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더디기만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데서 향기롭게 익어가는 포도주처럼 하나님의 시간은 무르익습니다.

마태복음은 여러 해 동안 이어졌을 신산스런 성 가족의 삶을 아주 간결하게 소개하면서, 그 큰 줄기를 하나의 실로 꿰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꿈입니다. 멀리 계신 듯 보여도 하나님은 그 가족과 함께 계셨고, 그 가족을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삶이 힘겨우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 겪는 고통은 없습니다. 비록 구름에 가려 태양이 보이지 않아도 태양은 분명 존재하듯이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멋진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지금은 힘들어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나사렛 사람의 뒤를 따르십시오. 주님은 우리 없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남보다 먼저 눈 밭에 길을 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슬떨이로 앞서 걸을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름에 응답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 모두 그 부름에 응답하여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삶의 기쁨과 신비를 경험하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12월 26일 16시 26분 0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