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메이드 인 청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19:16-25
설교일시 2005/1/2
오디오파일 s050101.mp3 [1072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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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청파
사19:16-25
(2005/1/2, 새해)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
청파 신앙 공동체에 부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교회는 새해의 목표를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로 정했습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일은 어제까지 하고 오늘은 그만 둘 일이 아닙니다. 저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평화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습니다. 평화는 다른 것 아닙니다.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독점 혹은 독차지는 분열과 갈등의 뿌리입니다. 그렇기에 밥도 나눠 먹고, 권력도 책임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눔을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남보다 큰 몫을 차지한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참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시간과 물질을 들여 이웃을 섬기는 기쁨을 꼭 맛보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평화의 씨앗은 혼자서는 뿌릴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농부들은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그 힘겨운 과정을 품앗이를 통해 즐거운 노동으로 바꿀 줄 알았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이지만,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사람들의 관계는 다릅니다. 일 더하기 일이 이가 될 수도 있고 '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출애굽 공동체라 말한 분이 있습니다. 교회는 뭔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을 때 그 행렬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지요? 믿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고 있습니까? 낮잠을 자던 토끼가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종말이 왔다고 외치자, 모든 동물들이 그 뒤를 따라 뛰었다는 우화는 바로 우리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이 부여한 행복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숨차게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눈을 뜬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비해 탁월한 기량을 보이는 운동선수를 보면 '저 선수가 눈을 떴다'고 말합니다. 눈을 뜨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게 보입니다. 홈런을 친 야구선수에게 물어보면 공이 배구공만큼 크게 보였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소위 안다 하는 이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39)

아람 왕이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한밤중에 군대를 출동시켜 도단 성을 에워쌌을 때의 일입니다. 선지자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성밖을 내다보고는 깜짝 놀라 선지자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자기들에게 닥친 위기를 전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주 침착한 어조로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희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말합니다. 사환이 미심쩍어하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그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았습니다(왕하6장). 예언자를 가리키는 다른 말은 '선견자'(seer)입니다. 그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절망의 때를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희망을 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주전 8세기는 역사의 암흑기였습니다. 애굽과 앗수르가 고대 중근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겨루고 있던 때였기에 그 대제국의 사이에 끼었던 이스라엘은 자칫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평화의 꿈이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던 그때 이사야는 역사의 주인은 대제국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애굽이든 앗수르든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정작 이사야의 비전이 놀라운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는 애굽이나 앗수르에 대한 속시원한 보복을 꿈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조차 품어 안으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애굽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심판은 살리기 위한 심판입니다.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살리기 위한 심판
하나님은 애굽 땅에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심으십니다. 그들이야말로 평화의 씨앗들입니다. 거대한 애굽 제국 내에서 그들은 미미하기 이를 데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땅에 심긴 씨앗은 봄 햇살을 만나면 깨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꽃을 피웁니다. 꽃이 피면 벌과 나비가 모여들 듯 그들 주위에 모여드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애굽 땅에서 그들의 삶은 평안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식물들도 낯선 종(種)이 자기들 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의 삶은 거울이 되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불편해지는 마음을 양심이라 합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양심을 "본래적 자기로 돌아가라고 '탓하는 부름'"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눈길을 의식하면 못된 짓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머니의 눈길처럼 그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믿는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는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그 심판의 목적은 그들조차 살리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22)

이사야의 비전은 여기서 더욱 장대하게 전개됩니다. 그는 대립하고 있는 두 적대적인 세력 사이에 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큰 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활발하게 오고가게 될 날을 그는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홍해 바다도 길이 되고, 요단강도 길이 됩니다. 죽음도 하늘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찬송 시인은 주님 안에서는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고 노래합니다. 봄 햇살이 비치면 꽃눈이 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너와 나를 가르는 벽이 무너집니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가팔라집니다. 그러면 그도 나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벽을 만듭니다. 둘 사이에 북풍이 불어옵니다. 이럴 때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그 벽을 허물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도 서로의 발을 닦아 주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의 발만 닦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힘들지만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상대방의 마음도 열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큰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평화란 상대방이 내 마음에 맞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릴 때 시작됩니다.

비전의 확장
평화에 대한 이사야의 비전은 다음과 같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애굽과 앗수르를 당신의 백성으로 다정하게 부르심을 듣습니다.

나의 백성 애굽아,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25)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나라들을 마치 한 가족처럼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눈에는 못마땅해 보이는 이들도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나라와 나라로 확장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라크도 소중하고 해일의 피해를 입은 아시아의 빈국들도 소중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을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동지섣달 어둠 같은 세상이라 해도 우리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면에 간직한 사람들은 저마다 애굽과 같은 세상에 심긴 희망의 씨앗이라 할 것입니다. 지난 12월 초, 시내의 여러 백화점에 늙수그레한 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남북경협사업의 첫 번째 결실로써 개성에서 만들어진 냄비를 사기 위해서 백화점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 제품에는 '메이드 인 개성'이라는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북에서 생산되기는 했지만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만들었기에 그런 표시를 한 것이라더군요. 냄비를 손에 든 분들은 싱글벙글하면서 그 속에 통일의 찌개를 끓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메이드 인 개성, 요즘 전문용어로는 마테 인 개성인가요? 저는 바로 그것이 우리 민족의 평화의 단초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동토의 땅에 심긴 희망의 씨앗처럼 보였습니다. 작은 시작이지만 그것이 자라 마침내 분단의 장벽을 허물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새해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꿈을 꿉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부여받은 삶의 자리에서 희망의 도성이 되는 꿈 말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메이드 인 청파'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평화는 빈자가 내거는 등 하나처럼 우리의 소박한 헌신을 통해 실현됩니다. 이 희망이 우리의 삶을 지켜내는 등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1월 02일 15시 03분 5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