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 하늘과 땅의 상통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3:13-17
설교일시 2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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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상통
마3:13-17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매년 1월 6일은 주현절(主顯節, Epiphany)입니다. 주현절은 2세기 경에 제정된 절기인데 부활절 다음으로 오래된 절기로서 주님의 탄생으로부터 사순절 이전까지의 공생애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현절은 서방교회 전통을 따라서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키고, 그 직후 주일인 주현절 첫 주일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합니다. 오늘 강대상 앞에 장식된 배너를 보십시오. 아래에는 흐르는 물을 상징하는 물결 무늬가 보이지요? 그리고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를 일컫는 첫 두 글자(ksi와 ro)를 상징하는 표시가 있고, 그 위로는 성령의 임재가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거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근거로 해서 두 가지 주장을 했습니다. 첫째, 용서함을 뜻하는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볼 때 예수도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니 요한이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변증하기 위해서 매우 고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고심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開門流下
요한은 당신 앞에 나온 예수님을 보면서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라는 큰 영혼 앞에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작음과 한계를 분명히 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하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음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을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발언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한 마디 말이야말로 예수님의 삶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동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굳이 세례를 받아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한 대학생에게 물었습니다.
"큰비가 오는 바람에 강이 흙탕물이 됐다고 하자. 그 물, 그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젊은이는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 가지 부류가 있겠지. 한 부류는 강둑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둑을 쌓는 사람들이다. 둑을 쌓고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나라면 물 속에 들어가 물과 함께 흘러가겠어. 함께 가며 맑아지는 거지."

예수님은 죄의 탁류가 흘러가는 뚝 위에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둑을 쌓고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릴 수만도 없었습니다. 그 탁류 속에 뛰어들어 함께 흘러가면서 맑아지는 길을 택하신 겁니다. 주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셨습니다. 욕망의 진흙구덩이 속에서 뒹구는 사람들을 더럽다며 멀리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開門流下라, 문을 활짝 열고 아래로 흘러간 겁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은 누구나 맑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씻기 원하는 사람들의 그 낮은 마음과 한 마음이 되시기 위해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 하늘과 땅의 상통
그런데 마태는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가시던 주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달아나던 야곱은 꿈에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계단을 보았습니다(창28:12).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도 순교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6). 하늘의 열림, 이것은 가장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야곱과 스데반은 가장 큰 생의 시련에 직면하여 열린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민중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여 그들의 자리에 내려서셨을 때 열린 하늘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어디이겠습니까만 바로 예수라는 분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게 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로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온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만나는, 혹은 상통하는 그런 분이라는 말입니다.

도봉산 우이암 부근에 원통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 절 이름을 보더니 말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 많아서 원통사(寃痛寺)인가?" 물론 우스개 소리입니다. 사실 그 절은 '둥글다, 온전하다'는 뜻의 '圓' 자와 '통한다'는 뜻의 '通' 자를 결합하여 두루 온전하게 통하는 진리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가끔 허튼 짓을 잘하는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역시 우린 통하는 게 있어" 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통하지 못해서 속상할 것은 없지만, 그들이 부럽지도 않습니다. 저는 하늘과의 상통을 꿈꿉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히 일치하는 날을 소망합니다. 지금 누구와의 상통을 꿈꾸고 계십니까?

● 하늘의 소리
예수님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보다 더 힘이 되는 말이 있을까요? 옛 유행가 가사에 이런 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사랑의 눈길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스쳐 닿는 그 손길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이렇게 좋은 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마치 하늘에서 장미꽃 다발이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와 연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걸어야 하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가 걸을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귀에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중들의 아픔 속에 화육해 들어가신 주님은 마지못해, 억지로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기쁘게 그 일을 감당합니다. 주님은 나중에 세상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負我 而學我)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吾 易吾負輕)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인 데 주님은 쉽다고 하십니다.

중용中庸 14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君子는 거이이사명居易以俟命하고, 小人은 행험이요행行險以 行이니라". 군자는 쉬운데 거하여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어려운 일을 하면서 요행을 바란다는 뜻입니다. 같은 일이 누구에게는 쉽고 누구에게는 어렵습니다. 능력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삶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큰 사람은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할 생각이 없으니 그 마음이 늘 한가롭습니다. 자기 능력만큼 열심히 일하고는 하늘의 명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신이 작은 사람은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려다 보니 늘 힘이 듭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악한 이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소화불량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을 배반하려는 유다를 보고도 "가서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사가 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을 믿기에 초조함 속에서 발을 구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분의 일을 하면서도 억지가 없으니, 예수님은 철든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사셨기에 주님은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요8:14),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신다"(요8:16)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에, 혹은 누구와 통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가볍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비틀거린다 해도, 넘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손보다 더 낮게 쓰러질 수는 없습니다. 탁류 속에 뛰어들어 그 물을 맑히시려는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1월 09일 15시 07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