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산 말, 죽은 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욥16:1-6
설교일시 2005/1/16
오디오파일 s050116.mp3 [581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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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말, 죽은 말
욥16:1-6
(2005/1/16)

[욥이 대답하였다.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희에게 마구 말을 퍼부으며, 가엾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열어 여러 가지 말로 너희를 격려하며, 입에 발린 말로 너희를 위로하였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이 고통 줄어들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보아도 이 아픔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 말문이 막힐 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어야 할 말이 때로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섬세한 우리 영혼은 거친 말, 모욕적인 말, 거짓말로 인해 상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매끄럽고 부드러운 말이 늘 좋은 말은 아닙니다. 시편 시인은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아픔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입은 엉긴 젖보다 더 부드러우나, 그의 마음은 다툼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55:21)

음모를 숨기고 말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처럼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세련된 말솜씨로 자기들의 욕망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뱀의 화술을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람 속에 깃든 내밀한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들도록 하는 그의 화술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시편 시인은 속으로는 악을 계획하고 날마다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뱀처럼 날카롭게 혀를 벼린 그들은,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있습니다"(시140:3). 그들에 비하면 비논리와 욕설과 억지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국회의원들은 한 수 아래입니다.

흠이 없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며 살던 욥에게 불행은 너무 느닷없이 닥쳐왔습니다. 하루 사이에 그는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명예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든든하다고 확신했던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 그가 느끼는 것은 삶에 대한 멀미였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가리켜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진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세에 겪어야 할 이런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 환난의 날들이 지난 뒤에 곧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그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24:29)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욥이 이런 처지에 빠졌다는 소문은 먼 곳에 살던 친구들에게도 들려왔습니다. 그 친구들은 불원천리하고 욥에게 달려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도 그저 고통을 당하는 친구를 위로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는 친구를 보았습니다. 기가 막혔겠지요. 그들은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 처참해서 입을 열어 한 마디로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란 철저히 외로운 사람 곁에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좋은 친구입니다.

● 위로자에서 쏘는 가시로
하지만 욥이 자기의 살아있음을 한탄하면서 하나님께 왜 내게는 죽음조차도 허락하시지 않냐고 항의하자 상황은 돌변하고 맙니다. 욥의 고통 속에 화육했던 친구의 모습은 간 데 없고, 그들은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욥이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자는 징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야말로 그의 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점잖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욥이 그들의 말을 수긍하지 않자 그들의 말은 점점 신랄해집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위로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양 욥을 몰아붙입니다. 그들이 욥의 불행을 함께 아파했을 때 그들은 친구였지만, 그의 불행을 해석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혔을 때 그들은 쏘는 가시가 되었습니다.

며칠 전 우리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했다는 설교 내용을 매스컴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남아시아를 휩쓴 지진과 해일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피해를 본 그 지역은 모슬렘과 불교도들이 주를 이루고, 기독교를 박해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휴양지인 그곳은 또 사람들이 몰려와 향락과 마약을 즐기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치셨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 기사를 듣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심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만한 정신,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사람의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은 바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의 무지와 완악함 앞에서는 설교를 하셨지만,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앞에서는 설교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뭐라 하셨습니까?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13:2-3). 여러분, 들리십니까? "그렇지 않다." 남아시아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 그런 불행을 당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세계화되면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재난에 더 취약하게 된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그들은 산호초를 잘라내고, 망그로브 숲을 개간해 골프장을 만들고, 해안도로를 만들고 휴양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해일이 밀려올 때 방파제 구실을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관광객들에게 싸구려 기념품을 팔거나 그들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재난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 일으켜 세우는 말
불행에 직면한 사람을 보면 일단은 그들 곁에 다가가(nearness)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feeling), 보살피고(care), 그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는 일(get up)이 우선입니다. 해석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하지요? 하지만 낮게 나는 새가 자세히 본답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곁에 다가간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 못합니다. 한끼 밥을 해결하기 위해 한 겨울에도 이른 아침부터 공원에 나와 기다리는 사람들, 노말핵산에 중독돼 다발성 신경장애, 일명 '앉은뱅이병'에 걸린 태국의 노동자들, 건빵 도시락을 받고도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결식 아동들…. 그들의 삶의 자리에까지 내려간 사람들은 김홍도 목사처럼 말할 수 없습니다.

욥은 자기의 불행을 죄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친구들을 향해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서있는 자리가 다르면 온전한 이해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의 아픔을 덜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의 이유를 해석하기에 분주한 사람들의 말은 죽은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산 말도 있습니다.

장애인들의 집인 라르슈 공동체를 세운 쟝 바니에 신부의 증언입니다. 한번은 그가 아이티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거칠고 원시적이며 난폭한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줄에는 이십여 명의 여자 죄수들이, 둘째 줄에는 이십여 명의 남자 죄수들이 있었고, 그 뒤에 나무로 된 커다란 우리 같은 곳에는 백여 명의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니에 신부는 그들에게 연설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죄수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바니에 신부는 그들에게 '아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아이와, 애정을 갈구하는 그 아이의 목마름, 그리고 그들과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나가더라도 몇 주만에 다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희망은 언젠가 세계가 여러분의 존재 깊은 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여러분의 존재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여 전 세계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 갈라진 모든 틈보다 더 깊은 그곳에, 애정을 추구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82-3쪽)

바니에 신부는 그때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고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그들은 일치의 순간을 맛보았습니다. 정죄의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해와 공감과 애정이 담긴 말이라야 변화의 기적을 이룹니다. 그런 말이라야 산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을 보고 주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주님께 등을 돌린 채 옛 생활로 재빨리 복귀해버린 제자들을 찾아가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와서 조반을 먹어라."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뭐라 했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야윈 어깨를 부둥켜안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말없는 말을 충분히 이해했을 겁니다.

● 어떤 말의 주인이 될 것인가
바니에 신부가 들려주는 일화 하나를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스무 살인 피에르는 두 살 때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열 다섯 해를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시력은 겨우 볼 수 있는 정도이고, 소리도 약간밖에 듣지 못하며, 이해 수준 역시 아주 낮았습니다. 이 작고 순박한 청년은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피에르는 열이 39.6도까지 올라갔습니다. 바니에 신부는 그의 침대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피에르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바니에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은 채 하나가 되어 그렇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함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그의 신뢰가 바니에 신부의 온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맞잡은 손은 하나됨의 표시 같았습니다. 그는 마치 기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살아있는 말이란 이런 것입니다. 입을 통해 발설되는 말만이 말이 아닙니다. 맞잡은 손도 말이 될 수 있고, 사랑을 담은 시선도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도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말은 어떠합니까?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죄하는 말, 조롱하는 말은 기독교인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의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새로운 생의 용기를 창조하는 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이웃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담긴 살아있는 말의 주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1월 16일 15시 03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