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10:19-25
설교일시 200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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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히10:19-25
(2005/1/2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도약판이 되어준 양

포수에게 쫓기는 영양 떼들이 벼랑 끝에 이르렀습니다. 천길 나락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언덕까지는 약 5미터. 제아무리 날쌘 영양도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였습니다. 우두머리 양이 혼자 벼랑 끝에 서서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돌아서서 길게 우짖었습니다. 그러자 영양 떼가 노장파와 소장파의 두 패로 갈렸습니다. 짝을 이룬 영양들은 거의 동시에 앞으로 내달아 낭떠러지 끝에서 도약을 했습니다. 젊은 양은 높이 뛰고 나이든 양은 낮게 뛰었습니다. 위아래 두 양이 공중에서 거의 한계점에 도달할 즈음 젊은 양의 발굽 밑에는 마침맞게 나이든 양의 잔등이가 위치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젊은 양은 그 잔등이를 도약판으로 삼아 한번 힘껏 굴러서 재도약을 했습니다. 젊은 양은 무사히 건너가 살고 나이든 양, 즉 도약판이 되어준 양은 천길 나락으로 꼿꼿이 떨어져 내려갔습니다. 영양의 무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성원의 절반을 희생하고 나머지 절반을 살리는 비상한 방법으로 공동체를 계속 유지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재중작가인 김학철의 산문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에서 읽었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사고자의 등을 떠밀어 올리고서는 정작 자신은 탈진해 익사한 이들을 기억합니다. 또 기차에 빨려 들어가는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가 자신의 발목을 잃은 철도원 김도균 씨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의로운' 철도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준 분들입니다. 세상은 날로 험악해가지만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사랑 '愛'자는 꿇어앉은 채 머리를 돌려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목멜 기 와 심장의 모습을 형상화한 마음 심心으로 구성된 단어입니다. 즉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큰사랑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 몸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20)

젊은 영양들을 위해 자기의 등을 기꺼이 도약판으로 내놓고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던 영양들처럼 예수님은 스스로 길이 되어 땅에 엎드리심으로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마땅합니까?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첫째, 날마다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코츠커라는 랍비는 인간의 곤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영혼들은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일단 땅에 닿자 사다리가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영혼들을 향해 다시 올라오라는 명령이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다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다리도 없이 어떻게 하늘에 오를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이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끝내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영혼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몸을 솟구쳐보지만 이내 땅에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거듭해서 시도해 보다가 결국 투쟁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래도 현명한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사다리도 없고 대용품도 없지만 우리는 명령받은 대로 해야한다. 결과야 어찌되거나 우리는 계속해 위로 오르려 애써야 한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우리를 당신께 끌어올리실 때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을 만큼 스스로 강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뛰어오르는 능력만으로 하늘에 닿을 수 없다. 다만 은총의 행위로 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진리를 향한 열정』, 149-150쪽)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고 말합니다. 우리는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골몰하다보면 우리는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됩니다. 거친 물살을 거스르며 헤엄치는 연어처럼 세속의 물결에 저항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이 약속 하나 꼭 붙잡고 세상의 물결을 헤쳐나갈 때 우리는 어느 결에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든든히 붙잡고 계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능수버들이 아닙니다. 카멜레온이 아닙니다. 형편에 따라서 입장을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누구를 대하든 사랑과 이해와 존경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능소능대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율법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었던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리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 마음이고 온전한 믿음입니다.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키라

둘째로, 성도는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길을 찾기까지는 이곳저곳 기웃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자기 삶의 길을 결정한 후에는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어부들은 배와 그물과 가족들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중심은 하나면 족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一)의 중심(中)에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충忠의 삶입니다. 하지만 중심이 여러 개가 되면 그 삶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근심 혹은 병(患)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 하나님이 정말 나를 기억이나 하시는 걸까?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걸까?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것을 '신의 일식日蝕'( The eclipse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뭔가에 가려져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둠 너머에, 구름 너머에 해는 찬연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 고전을 읽다보면 윤집궐중允執厥中이니, 택선고집擇善固執이니, 주일무적主一無適이니 하는 말과 만날 때가 많습니다. '오직 그 중심을 굳게 잡으라', '선을 택한 후에는 그것을 든든히 붙잡으라', '하나의 중심을 정하고는 여기저기로 옮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두 한가지 사실을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삶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재주 많은 사람보다는 꾸준한 사람이 뭔가를 이룹니다. 재능이란 어쩌면 재주라기보다는 지속에의 열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길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의 말과 행동과 마음씀을 조율해가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삶으로는 예수를 부정하는 이들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화천에 있는 시골교회의 임낙경 목사님께 기독교방송 기자가 목사님의 소속 교단이 어디냐고 묻자, 임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정말 알고 싶냐고, 그렇다면 잘 받아 적으라면서 '대한 예수팔아 장사교'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모습을 한 마디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짝퉁 예수꾼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연 그 길은 걷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찬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붙잡는 길은 울면서라도 그 길을 걷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 격려하라

셋째, 그 길을 함께 가는 성도들은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은 혼자 걷기에는 매우 위험하고 힘겹습니다. 그래서 함께 힘을 북돋워주며 걸어갈 길벗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가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보아도 그 말씀이 종작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자본주의적 가치관은 압도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말없이 희망의 불꽃을 피우는 이들을 보면서 용기를 냅니다. 우리는 희망과 절망이 50 대 50은 되어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1%의 희망만 있어도 세상에는 희망이 있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급하다고 해서 곧바로 장작에 불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차디찬 아궁이에서 거슬러 부는 바람 때문에 성냥불이 꺼지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른 잎새를 긁어모아 불쏘시개에 먼저 불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에도 옮겨 붙게 마련입니다. 냉랭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마음조차 냉골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까? 아궁이를 거슬러 불어 연약한 불꽃을 꺼뜨리는 바람은 바로 우리들의 교만함과 이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마음을 적시고 있는 욕심의 물기 때문에 장작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에는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1%의 희망입니다. 주님의 탄식이 들리십니까?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눅12:49) 함석헌 선생님은 세상의 잘난 이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세상에 희망의 불을 붙이려는 이들의 희망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굵고 미끈한 재목인 듯 잘난 맘들
이 낮은 자의 믿음 비웃사오나
이 불쏘시개 겸손히 잘 타면이야
저흰든 아니 타고 견디오리까?
(함석헌, [장작불])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사랑과 선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희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굳게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그 길을 걷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1월 23일 15시 28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