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미혹되지 말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1:7-11
설교일시 200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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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迷惑)되지 말라
눅21:7-11
(2005/1/30)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 사이비 종교의 못자리
남영역 앞에서 길을 건너려는 데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은총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계시처럼 들려온 그 말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멜기세덱교를 소개하는 팜플렛을 내밀었습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길을 걷다보면 요한계시록 전문가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산불이나 남아시아의 지진 해일은 다 말세의 전조(omen)입니다. 그들은 큰 지진을 예고하는 여섯 번째 봉인이 이미 떼어졌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똑같은 사건을 두고 물로 인해 많은 생명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예고하는 셋째 천사의 나팔이 울렸다고도 말합니다. 왜 이렇게 다른 해석이 나오는 거지요? 요즘 전문 용어로 하자면 '그건 그때그때 달라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망한 말에 속아 이단 종파에 빠집니다. 거리에서 말세를 선포하는 사람들의 눈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얼빠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혹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과 계시라는 게 몰상식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활이 풍족해지고, 세상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 늘어난 시대에 그런 사이비 종파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기를 얻어도, 권력의 자리에 앉아보아도 채워지지 않는 허방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허무의 소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없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가끔 그 고향의 부름을 듣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달리 말합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 있다고 말입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종을 알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미래는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에 유동적입니다. 그것은 안개와 같아서 전망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불안을 느낍니다. 뭔가 확실한 것을 손에 쥐고 싶은 욕망은 거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점쟁이를 찾아가고, 예언기도를 한다는 사람을 찾아가는 마음이 다 비슷한 것입니다. 인생은 본래 모호한 것이고, 내가 주체적으로 길을 선택해야 하지만 선택에 따른 책임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랍니다. 음식점에 가서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심리와 비슷합니다. 독일말로 미신을 뜻하는 단어는 아버글라우베(Aberglaube)입니다. '아버'는 '그러나'라는 뜻이고 '글라우베'는 '믿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더라도 그래도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허약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도 흔들릴 여지를 주는 말보다는 확신에 찬 말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을 보면 신령하다고 합니다. 은혜롭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즐겨 어떤 사람의 신민(臣民)이 됩니다. 정신적으로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허약한 마음이야말로 사이비 종교의 못자리입니다.

●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헤롯 대왕이 지은 성전을 둘러보고 나오시다가 어떤 사람들이 성전 건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웅장한 돌이며, 아름답게 장식된 봉헌물들은 그곳이 거룩한 곳임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찬탄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21:6) 뜻밖의 이야기에 당황한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중에 주님께 물었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징조 없이 일어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출항하려는 배에서 쥐가 내리면 뱃사람들은 파선의 징조로 받아들인다지요? 개미가 행렬을 이루어 높은 곳으로 이동하면 큰비가 올 징조임을 압니다. 몸의 통증은 몸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알리는 나팔수입니다. 다가올 사건은 그에 앞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그 징조는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엉뚱해 보입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8a)

여기서 '迷'라는 글자는 '미혹할 미'이기도 하고 '길 잘못들 미'이기도 합니다. '惑' 자는 '혹시·행여나·어쩌면' 등을 뜻하는 '혹 或'에 '마음 心'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미혹된다는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제 정신을 잃는 상태를 뜻하는 말일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주체성을 잃는 것이겠네요.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다른 주인이 나를 마음대로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미혹됨입니다. 소위 '명품'만 보면 건전한 이성을 잃어버리고 그것이 내 것이지 네 것인지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쾌락에 미혹된 영혼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미혹된 영혼들은 삶의 많은 영역들에 괄호를 치고 어떤 한정된 현실에 중독 된 채 살아갑니다. 그것만이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됩니다. 사이비 종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기 쉬운 미혹의 내용도 설명해주십니다.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8b)

사이비 종교의 특색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 종말론적 경향
첫 번째 특성은 종말론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종말이 임박한 때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급박하게 몰아갑니다. 그들이 요한계시록에 집착하는 것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계시록에 예시된 종말의 징조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지금은 종말을 예견케 하는 시대입니다. 전쟁의 소문이 그칠 새 없이 들려오고, 병든 지구의 몸부림이 피부에 느껴지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과학자들도 우리가 지금처럼 살다가는 머지 않은 장래에 엄청난 재난을 맞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생명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대한 인식은 같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주입합니다. 그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탈(脫)세계적인 곳을 향하게 합니다. 이 세상은 장차 망할 도성이기 때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셨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곳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 배타성
사이비 종교의 두 번째 특색은 배타성입니다. 그들은 울타리를 좁게 쳐놓고는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참 종교의 특색은 개방성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거짓 종교는 폐쇄적입니다. 아니, 사실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면서 그 입구는 좁은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마치 홈쇼핑 호스트들이 매진이 임박했다고 말하면서 망설이는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종교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계시를 받은 자기들의 공동체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곳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개인주의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들이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노아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들려주는 미드라쉬(성문화된 본문에서 그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주석 과정과 그 결과를 모아 놓은 책)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왔을 때 노아는 온 세상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았다. 그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오 노아, 너는 앞으로 태어날 아브라함과 많이 다르구나.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나의 계획을 알아차리고는 그 성을 구하기 위해 중보자로 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아, 내가 온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네게 말했을 때 나는 좀 멈칫거리고 있었단다. 나는 네가 세상을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안전한 방주에 들어가서 악한 세상이 더 이상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너는 네 가족 말고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제 불평을 늘어놓니?" 노아는 그제서야 자기가 죄를 지었음을 알았다.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웃과 세상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돌보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 헌신에 대한 강압
사이비 종교의 세 번째 특색은 헌신에 대한 강압입니다. 사이비 종파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에 중독 되어 건전한 판단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임박한 종말의 때에 모든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거짓 종교에 미혹되어 가산을 다 탕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사이비 종파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속은 이리입니다. 그들은 경건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제 배를 채우기에 혈안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9) 인류가 땅에 출현한 이래로 땅 위에 분쟁과 갈등이 없던 때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조건인지도 모릅니다.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11).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징조가 눈에 보일 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고,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먹이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현장에 계셨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참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노예가 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왜곡하여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쓰라림을 받아들이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기꺼이 동참하자고 촉구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희망의 등불을 밝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복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고, 스스로 복 받는 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에 우리를 초대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1월 30일 15시 17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