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6. 부르심에 합당한 삶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살후1:3-5, 11-12
설교일시 2005/2/6
오디오파일 s050206.mp3 [716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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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1:3-5, 11-12
(2005/2/1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이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 마음 닦음
저는 거의 매일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귐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도 있지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가리고 살아서 그렇지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처자국 하나 없이 말짱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때는 산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 슬픔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입는 상처는 대개 가까운 이들의 무정함에서 비롯됩니다. 생명은 모두 사랑 받기를 원하는 데, 무정한 세상은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재능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마음이 푼푼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바로 이런 품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시떨기와 엉겅퀴가 자라는 것은 척박한 땅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에서도 자라고 있습니다.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조금씩 부족합니다. 넉넉한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겨우 견딜 수 있는 게 우리입니다. 분주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마음을 기대고 쉴 만한 언덕을 그리워합니다. 언제나 찾아가 마음을 쉴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몹시도 그리운 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모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화내고, 후회하고'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마음을 그냥 방치하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편협해집니다. 너무 늦기 전에 묵정밭을 일구듯 정성을 다해 마음을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 닦음을 동양 사람들은 '심재'(心齋)라 했습니다.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마음의 재계란 어떤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귀로 소리를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
(一若志 無聽之以耳 而聽之以心) [莊子, 人間世 5]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하나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저런 궁리를 하게 되고, 마음은 갈팡질팡 길을 잃게 됩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는 분주한 발걸음을 그치고 고요히 앉아야 합니다. 지관타좌只管打座란 말 들어보셨습니까? '오직 앉으라'는 말입니다. 앉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말을 넘어서 그의 가슴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판단하지 말고, 내 마음을 열어서 그가 그 속에 들어와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애쓰다보면(active listening) 우리 마음이 저절로 맑아집니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그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 한 삶의 진실이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비밀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요14:10)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살전2:4)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분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삶의 동기가 이렇듯 선명하기에 예수님도 바울도 힘있게 살 수 있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런저런 궁리가 많습니다. 채울 생각이 앞서다 보니, 인생이 복잡해지고, 걱정도 늘어나고, 마음은 더러워지고, 눈과 귀는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놓치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꾸준하게 마음을 닦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무엇을 감사할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에 철저했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려고 애를 썼고, 날마다 조금씩 새로운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 바울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3)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는 교인수가 늘어서가 아닙니다. 헌금액수가 많아져서도 아닙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많아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인들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의 성적이 올라가면 매우 좋아합니다. 목사들은 교우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upward to God)을 보면 좋아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고, 흔들리면서도 점점 튼튼한 줄기를 얻어 가는 것을 보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믿음은 시험을 잘 이겨낼 때 성장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려 할 때 믿음은 자랍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눈길이 세상의 현상을 넘어 하나님의 진실에 미치고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성도들이 고난을 함께 겪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고 있다는 사실(outward to their fellow believers)입니다. 고난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허사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함께 고통을 헤쳐나갈 때 사귐은 더욱 농밀해집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제 제 좋을 대로,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면서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누려는 큰 마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이 바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런 감사가 우리 교회에도 넘치기를 바랍니다.

● 무엇을 자랑할까?
바울은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것은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이 간직한 인내와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팎에 있는 많은 적대적 시선을 견뎌야 했습니다. 살다보면 눈을 질끈 감고 적당히 이 세대의 풍조를 따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 하는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보셨지요?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뭔가 떳떳치 못한 짓을 하려 하면 가족들의 사진이 담겨 있는 액자를 슬쩍 돌려놓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믿는다고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초대 교회의 형편은 달랐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롬10:10)고 했습니다. 이때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건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기에게 닥쳐올 위험과 온갖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성도들의 고난을 결코 허비하시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고후4:17)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복종하면 우리는 시련을 겪는다 해도 그 덕분에 인내와 성숙한 삶을 열매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버섯은 따고 나면 즉각 또 수확할 수 있지만, 단단한 참나무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로 그런 인내를 통해 신앙적 품격을 얻었습니다. 그게 너무나 고마워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자랑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삶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신앙적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아름다워질 겁니다.

● 무엇을 구할까?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의 안일과 행복과 번영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11)

바울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속해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하나의 초대가 아니겠습니까?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께 날마다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대답하실 겁니다. '얼굴을 펴라', '저 쓸쓸한 사람에게 다가가라', '저 우울한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라', '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꼭 이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좀 쉬어라', '기다려라', '운동을 하거라'…. 주님을 향해 마음의 귀를 열어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속에 작은 씨앗의 형태로 숨어 있는 선한 뜻이 꽃처럼 피어나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소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면 그건 내가 노력해서일까요?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런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사도 바울을 비롯해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산다는 게 온통 사랑의 빚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정도라도 목사 노릇하고 사는 것은 제 덕분이 아니라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임을 저는 고마움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에 고마움을 간직하고 조심조심 살면서, 서로를 진심으로 공경하며 산다면 우리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the believer who glorifies Christ is likewise glorified in Christ).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더욱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십시오. 인생의 어둔 밤을 벗어나는 길은 울면서라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꾸준히 주님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어둠이 물러갔음을 알게 될 겁니다. 절기는 입춘을 지나 우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잠들어 있던 사람들의 사랑과 이해의 마음이 깨어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긴 겨울에 지친 영혼들에게 봄소식이 되어 다가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2월 06일 17시 21분 3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