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 봄빛으로 오는 말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147:12-20
설교일시 200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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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으로 오는 말씀
시147:12-20
(2005/2/13, 졸업감사예배)

[예루살렘아, 주님께 영광을 돌려라.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이 네 문빗장을 단단히 잠그시고, 그 안에 있는 네 자녀에게 복을 내리셨다. 네가 사는 땅에 평화를 심어주시고, 가장 좋은 밀 곡식으로 너를 배불리신다. 주님이 이 땅에 명만 내리시면, 그 말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양털 같은 눈을 내리시며, 재를 뿌리듯 서리도 내리시며, 빵부스러기같이 우박을 쏟으시는데, 누가 감히 그 추위 앞에 버티어 설 수 있겠느냐?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니,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른다. 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전하시고, 주의 규례와 주의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신다. 어느 다른 민족에게도 그와 같이 하신 일이 없으시니, 그들은 아무도 그 법도를 알지 못한다.]

● 두 개의 세계
일년 삼백 육십 오일, 똑같은 24시간을 살면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하루의 내용은 같지 않습니다. 겨울날과 봄날이 다르고, 여름날과 가을날이 다릅니다. 옛 사람들은 일년을 태양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24절기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절기라 할 때의 '절'은 '마디 節'입니다. 이 글자에는 대나무 竹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마디가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시간의 강물을 지치고 않고 건널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매듭인 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겨울을 지나고 있지만 이미 立春이 지나고,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雨水를 앞두고 있습니다. 봄이 어느 골목 어귀를 서성이며 이렇게 지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은 겨울의 끝자락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맘때쯤이면 각급 학교 졸업식이 있습니다. 귀여운 유치부 어린이들로부터, 의젓한 초등학생, 듬직한 중학생, 그리고 조금씩 어른 티가 나는 고등학생, 그리고 취직걱정 때문에 다소 지쳐 보이는 대학생들…. 저들은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졸업이란 인생에서 하나의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매듭은 성장의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의 출발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졸업생들을 축하하면서 저들의 앞날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상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먹고 일하고 자고 남들과 경쟁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유능한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승리자가 소수이고 패배자가 다수인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이고 영혼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유능한 사람보다는 친절한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일상의 세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단어는 '경쟁'이지만, 이 신앙의 세계를 규정하는 단어는 '사랑'입니다. 이 세계는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열린 세계입니다. 여기 어린이들도 있기 때문에 동화 한 편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헨리에타의 첫 겨울
헨리에타는 아직 아가예요. 헨리에타의 엄마는 봄에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헨리에타를 낳느라 너무 힘이 들어서 그랬대요.
숲 속엔 가을이 왔어요. 헨리에타는 나뭇잎들이 노란색, 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숲을 바라보았어요.
숲 속 동물들은 딱딱한 열매와 물렁물렁한 열매들을 모으느라 바빴어요.
"헨리에타야, 너도 얼른 겨울 먹을거리를 모아 놓아야지.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모두 옷을 벗는단다.
그래서 먹을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돼." 하고 동물들이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헨리에타도 땅을 파서 먹을거리를 넣어 둘 곳간을 만들었지요.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열매들을 찾아다녔어요.
곳간은 금방 먹을거리로 가득 찼어요.
헨리에타는 의자에 앉아 깊은 잠에 빠졌어요.
'후두둑후두둑' 하는 소리에 헨리에타는 그만 잠에서 깼어요.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후두둑'거리는 소리가 집안에서도 들리잖아요.
헨리에타는 얼른 곳간 문을 열어 보았어요.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헨리에타의 겨울 먹을거리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집밖으로 흘러나가 땅바닥에 흩어지고 말았어요.
헨리에타는 빗물이 새어 들어온 구멍을 막은 다음,
장화를 꺼내 신고 밖으로 나갔어요.
열매들을 다시 찾아와야 하니까요.
다행히 곳간은 다시 가득 채워졌어요. 헨리에타는 차를 한 잔 따끈하게 데워서 마시고는, 따뜻한 벽난로 옆에 앉아서 눈을 붙였어요.
하지만 헨리에타는 깜짝 놀라 눈을 떴어요. 곳간에서 무언가를 '와작와작' 씹어먹는 소리가 들려 왔거든요. 헨리에타는 곳간 문을 살며시 열었어요.
곳간 안에는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는 온갖 벌레들이 모여서 헨리에타가 모아 놓은 열매들을 몽땅 먹어치우고 있었어요. "얌얌, 맛있다!" 하면서요.
헨리에타는 벌레들을 모두 곳간 밖으로 쫓아냈어요.
불쌍한 헨리에타! 이제 남아 있는 거라고는 빈 껍질들뿐이었어요.
헨리에타는 내일 또다시 숲 속을 돌아다니며 열매를 찾아야 했어요.
다음날이 되었어요. 벌써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어요.
나뭇잎들도 거의 다 떨어져 버렸고, 열매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어요.
헨리에타가 다시 곳간을 가득 채울 만큼 열매들을 모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몸도 몹시 피곤할 거예요.
숲 속 동물 친구들이 혼자 열매를 찾으러 다니는 헨리에타를 보았어요.
그리고는 모두들 집밖으로 나왔어요.
동물 친구들은 헨리에타가 곳간을 다시 가득 채우는 걸 도와주었어요.
헨리에타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동물 친구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열었어요.
정말 멋진 잔치였어요.
친구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잔치를 하느라 열매들을 모두 먹어 버렸지 뭐예요.
헨리에타는 창 밖을 내다보았어요. 눈이 온 숲 속을
하얗게 뒤덮어 버렸어요. 헨리에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숲 속엔 열매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말이죠.
헨리에타는 너무 피곤한 데다가 배가 몹시 불렀어요.
"아흠, 너무 졸려. 먼저 잠을 좀 자야겠어."
헨리에타는 혼자 중얼거렸어요.
"한숨 자고 일어나서 열매를 찾아봐야지.
혹시 눈 밑에 부스러기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헨리에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숲 속엔 벌써 봄이 왔어요!
(롭 루이스, 『헨리에타의 첫 겨울』)

● 아직 비지 않은 창고
헨리에타는 세상일에 미숙합니다.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동물들이 헨리에타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줍니다. 친절한 이웃들입니다. 헨리에타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몸으로 겪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세상일에 익숙해집니다. 먹을 양식이 물에 휩쓸려 갔을 때에도, 벌레가 양식을 다 먹어치웠을 때에도 헨리에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어려움을 함께 나눌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울나기를 위한 양식을 다 모았을 때, 헨리에타는 기쁜 나머지 그 멋진 친구들을 위해 신명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때문에 양식 창고가 텅 비어버렸습니다. 헨리에타는 아직 살림을 규모 있게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고는 비었지만 한 가지 비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낙관론이었습니다. 헨리에타는 염려로 파리해지기는커녕 잠을 맛있게 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봄이었습니다. 헨리에타가 두 번째 맞는 겨울에는 삶에 좀 더 익숙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헨리에타가 나눌 줄 모르는 욕심 많은 다람쥐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도 낙관론자입니다. 생의 어려움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어느 신학자(Paul Tillich)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존재의 근거'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있으면서 모든 것들을 있게 해주는 밑바탕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처럼 그럴듯한 말이 없습니다. 눈이 어두워 그렇지, 신앙의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시고, 그 아픈 곳을 싸매어 주시는 분'(3)이십니다. '불쌍한 사람은 도와주시고, 악인을 땅의 먼지만큼이나 낮추시는 분'(6)이십니다.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시는 분'(4)이십니다.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 내릴 비를 준비하시어, 산에 풀이 돋게 하시며, 들짐승에게,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이를 주시는 분'(8-9)이십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위해 '문빗장을 단단히 잠그시고, 그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13)입니다. '양털 같은 눈을 내리시며, 재를 뿌리듯 서리를 내리시며, 빵 부스러기같이 우박을 쏟으시지만' 때가 되면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셔서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흐르게 하십니다.

● 복 있도다, 말씀의 전달자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생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우리 생에 봄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슴에 깊이 들어올 때 우리 가슴에 맺혀 있던 미움과 질시의 얼음은 녹고, 사랑과 이해와 존경의 물이 흘러 메말랐던 생명을 되살리게 됩니다.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그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삶을 통해 전달됩니다. 이 거룩한 소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사순절 순례의 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서리도 우박도 얼음도 다 녹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봄이 와, 우리가 물이 되어 흐른다면 잠들었던 생명들이 깨어날 것입니다. 그 생명들의 수런거림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봄소식을 전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에 대해 미숙하기 이를 데 없었던 헨리에타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따뜻한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듯이, 우리들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헨리에타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순례자들이 택해야 할 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 머무는 곳마다 막혔던 물줄기가 이어지고, 인정의 꽃·사랑의 꽃·평화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2월 13일 16시 48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