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 예언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28:1-9
설교일시 200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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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렘28:1-9
(2005/2/20)

[같은 해, 곧 시드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한 지 사 년째가 되던 해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다.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주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렸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 간 주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친히 이 년 안에 이 곳으로 다시 가져 오겠다.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빌로니아로 잡혀 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그러자 예언자 예레미야가 주의 성전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자 하나냐에게 대답하였다. 그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멘. 주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주께서 성취해 주셔서, 주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가 바빌로니아에서 이 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기를, 나도 바라오. 그러나 당신은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들으시오. 옛날부터 우리의 선배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에 전쟁과 기근과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소.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 토정비결을 보는 마음
설이 지나고 벌써 여러 날이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아버지는 새해가 되면 늘 토정비결을 꺼내놓고는 가족들의 운세를 가늠하곤 하셨습니다.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이 약간 냉소적으로 그걸 뭐 하려고 보시냐고 물으면, 그저 재미로 본다고 하셨습니다. 꼭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이 고단한 시간의 여울을 건너면서 노 하나쯤은 갖추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닌가 헤아려집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점을 많이 봅니다. '四柱 까페'라는 것도 생겨서 성업중입니다.

토정비결을 보거나 점을 친 사람치고 그것이 틀렸다고 불평을 하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중도가 높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그 높은 적중도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토정비결을 예로 들어볼까요? 토정비결은 비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아동일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첫 번째 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동풍에 얼음이 풀리니 마른나무가 봄을 만나도다 東風解氷 枯葉逢春
작게 가고 크게 오니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룬다 小往大來 積小成大

사람들은 이 구절을 대할 때 '마른나무가 봄을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일까를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비유의 해석자가 되는 거지요.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장사도 잘 되고 자금회전도 잘 되는 상황을 생각할 것이고, 사랑의 고뇌 속에 있는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잘 되는 상황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월에는 반드시 귀자를 낳는다 卯月之中 必生貴子

팔십이 된 노인이 이 토정비결을 본다면 이월에 아들을 낳는다는 말에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요? 그렇지만 노인은 이 구절을 이월에는 아들을 낳는 것처럼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로 새기겠지요. 비유의 언어는 이처럼 다의적이어서 누구라도 자기 상황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 진실을 말하는 사람
세월이 하수상하다 보니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점 집을 찾는 이들이 많답니다. 예언 기도를 받고 싶어서 소위 기도를 깊이 한다는 분들을 찾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수 차례 말씀드린 대로 성서의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의 초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지금 변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예언의 목적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꿰뚫어봅니다. 예언자들은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편견과 생각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은 때로는 과격해 보이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절망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들려줄 때도 있습니다만 미구에 닥쳐올 재앙을 예고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입니다. 예언의 성공은 예고한 일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돌이켜 재앙을 면하는 것이 예언의 성공입니다. 예언의 말이 그대로 성취되면 실패한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 속에 살기에 그는 불행합니다.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가 되기를 자청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20장에 보면 예언자로서 그가 느끼는 당혹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7).

좀 불경하게 들리지요? 그는 하나님의 꾐과 위협에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자기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누가 그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속으로 다짐해봅니다. '이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9). 우리는 그의 말을 통해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어떤 초대에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압도적인 힘에 의해서 자기의 의지가 꺾이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요.

예레미야는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기에 예언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는 일에서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백성을 보호하던 손길을 거두시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지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반역자라는 누명을 썼고,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 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그는 나무로 멍에를 만들어 목에 메고 다니면서, 미구에 닥쳐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지배를 몸짓 언어로 예고했습니다.

● 참 예언자, 거짓 예언자
어느 날 예레미야는 성전에서 하나냐라는 예언자와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에게 경멸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뭇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들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미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셨기 때문에, 탈취 당했던 성전의 기구들은 이 년 내에 되돌려 받게 될 것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도 다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성경은 그 말을 듣고 있던 백성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쳤을 겁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절망스런 소식들만 들려오는 시기에 명백하고, 확정적인 하나님의 뜻을 들었으니 말입니다. 예레미야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아멘, 주님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당신이 예언한 말을 주님께서 성취해 주셔서, 주님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가 바빌로니아에서 이 곳으로 되돌아 올 수 있기를, 나도 바라오."(6)

그러나 하나냐의 말은 모든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참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생각과 소망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느냐는 예레미야의 말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똑같은 현실을 두고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말은 정반대로 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그의 말이 듣기에 거북하고, 우리에게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면 참 예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6:60) 하면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참말은 귀담아 듣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외롭습니다.

그에 비해 거짓 예언은 달콤합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박수갈채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에 비춰내듯 우리들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거짓된 말은 우리의 흉한 모습을 감추는 옷자락이 됩니다. 정진규 시인은 나무들은 봄날에 꽃으로, 초록 눈엽(嫩葉, 어린 잎, 새로 돋아난 잎)들로 본색을 탄로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엔 어쩔 수 없이 정답이 나온다."(<本色> 중에서) 그렇지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자기의 현실과 대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는 사람들의 말이 참인지는 그가 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판별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귀에 들큼한 말을 속삭이거든 경계하십시오. 누군가 애정을 담아 꾸짖거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을 가슴에 모시십시오. 거짓 예언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참 예언은 오히려 비좁은 마음을 넓혀줍니다. 거짓 예언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외면하도록 해줍니다. 참 예언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 자기 초월의 순간
얼마 전 산악인 박정헌·최강식씨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히말라야의 졸라체 암벽 정상을 등정하고 내려오던 중 크레바스(빙하 틈새)에 빠져 각각 양다리 뼈와 갈비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은 채 기적적으로 생환했습니다. 그들은 일년 365일 가운데 단 하루도 해가 들지 않는 졸라체 암벽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등반한 뒤 하산하던 중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거의 안전한 지대에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후배인 최정식씨가 크레바스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최씨는 떨어지면서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크레바스에 부딪혀 양 발목의 작은 뼈들이 한꺼번에 부러지고, 발꿈치 뼈들까지 으스러졌고, 박정헌씨는 최씨와 연결되어 있던 로프에 걸려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로 후배의 몸무게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허리가 부러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그는 후배를 잡아당겼고, 후배도 완강기를 이용해 조금씩조금씩 위로 올라왔습니다. 오직 살려는 일념 하나로 2시간의 사투 끝에 최강식씨는 사지를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심한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다 잘라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의 크레바스와 혹한의 추위도, 뼈가 부서지는 아픔도 둘을 연결한 생명 줄을 끊지는 못했습니다. 최강식씨는 "크레바스 속에서도 '형이 나를 버리지 않을 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희망은 죽음보다 강했고, 믿음과 우정은 마침내 절망을 이겼던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박정헌씨는 후배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자기 초월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손가락을 잃었지만,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정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말씀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신 곁을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요6:68-69)

이게 믿음입니다. 달콤한 말, 우리를 현혹하는 말들에 속지 말고, 부담스럽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 존재로 모시고 살 때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육신을 입히는 과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5년 02월 21일 10시 36분 44초